[이용재의 식사(食史)]
<91>초가공식품의 역사와 현재
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흥미진진한 역사 속 식사 이야기를 통해 ‘식’의 역사(食史)를 새로 씁니다.
거의 매일 마트에 간다. 식재료를 사기도 하지만 남들이 무엇을 사는지도 관찰한다. 특히 계산대에 줄을 서 있을 때가 좋은 기회다. 각자 선택이 매우 다양할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소시지나 과자, 탄산음료 등이 눈에 가장 많이 들어온다. 전반적으로 고기나 생선, 채소나 과일 등 자연에서 생산된 식재료의 비율이 굉장히 적어 보인다.
나 한 사람의 관찰만으로 패턴을 추론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과자나 소시지 같은 '초가공식품'의 약진을 무시할 수 없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 그냥 '가공식품'도 아닌 '초가공식품'이다. 자연 상태라면 존재하지 않을 가공식품을 이제는 초가공식품이라고 규정한다. 예를 들어 오렌지가 자연식품이라면 '오렌지맛' 탄산음료는 초가공식품이다. 오렌지는 거의 혹은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한국인, 열량 25%를 초가공식품에서
초가공식품 소비 데이터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한 일간지의 2024년 3월 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섭취 열량 가운데 25%가 초가공식품으로 채워진다. 미국의 58%에 비하면 현저히 낮지만 지중해 인근 이탈리아인들의 초가공식품 섭취 비율은 10%다. 말하자면 이탈리아의 더 자연스러운 식단에 비해 우리가 2.5배나 많이 초가공식품을 먹는 셈이다.
초가공식품은 과학과 기술 발전을 인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활용하려는 각종 시도에서 비롯됐다. 실온에서 2시간 이상 두면 부패가 시작되는 우유의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한, 19세기 후반 등장한 파스퇴라이제이션(저온 살균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나폴레옹이 네덜란드, 독일 등과 전쟁을 치르는 장병들을 잘 먹여서 사기를 올리고자 공모한 병조림과 여기에서 발전한 통조림도 있다.
19세기에 등장한 냉동 및 냉장 기술은 또 어떤가. 덕분에 우리는 모든 식품을 좀 더 좋은 상태로 오래 먹을 수 있게 됐으며, 아이스크림 같은 음식도 수시로 즐길 수 있게 됐다. 말하자면 산업혁명 전후부터 과학기술이 식음료의 보존과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는데, '과유불급'이 돼 궁극적으로는 인류에게 해로운 방향으로 발전한 결과물이 초가공식품이다. 자연을 견디다 못해 자연에 저항하거나 초월하는 음식이 등장한 것이다.
초가공식품에 대한 인식과 규정은 1980년대부터 시작돼, 200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본격화됐다. 그 선봉에 미국의 마이클 폴란이 있다. 악화하는 현대인의 음식 환경에 대한 굵직한 저서를 여러 권 남긴 그는 '잡식동물의 딜레마(2006)'에서 초가공식품을 '먹을 수 있는 음식 같은 물질'이라고 정의했다. 실제 과일이나 연유 등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과일맛' 캐러멜이 대표 사례다.
가난한 사람이 왜 더 뚱뚱할까?
폴란의 영향을 받아 2009년, 브라질에서 노바 분류법이 등장했다. 노바 분류법은 브라질 상파울루대학의 유행병 학자인 카를루스 몬테이루 교수가 창시했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그는 의학을 공부한 뒤 영양실조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중반 식생활의 변화가 빈곤층의 비만 증가에 영향을 미쳤음을 발견한다.
반면 부유층의 비만율은 감소했음을 발견하고는 개별 요인보다 영양 섭취의 큰 그림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시행한다. 그는 브라질 사람들이 섭취하는 음식을 기준으로 두 부류로 극명하게 패턴이 나뉨을 발견했다. 쌀과 콩 등 자연에서 비롯된 브라질의 전통 음식을 먹는 부류와 초가공식품을 먹는 부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새로운(포르투갈어로 Nova) 식품 분류'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것이 노바 분류법의 기원이 됐다.
노바 분류법은 음식을 크게 네 부류로 나눈다. 1군은 약간 가공되거나 아예 가공되지 않은 음식이다. 동식물이나 해초, 버섯, 물처럼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다. 보존을 위해 건조, 살균, 냉동, 비알코올 발효 등을 거쳐도 특성을 잃지 않는다. 우유를 발효시킨 요구르트, 냉동 채소도 여전히 1군에 속한다. 한편 2군은 가공된 식재료다. 역시 자연에서 경작을 통한 식재료를 갈거나 압착하거나 건조 등을 해 얻어내고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건강한 식재료의 대명사로 꼽히는 올리브기름을 비롯한 대부분의 씨앗이나 견과류의 기름이 2군에 속한다. 그 밖에도 소금, 설탕, 식초, 전분, 꿀, 메이플시럽, 버터 등 맛을 내고 조리에 쓰는 보조 식재료들이 있다. 다음 3군은 1군의 식품에 2군의 소금이나 설탕 등을 더하고 공업적인 절차를 거쳐 보존성을 높인 식품이다.
3군의 대표로는 통조림을 꼽을 수 있다. 미생물이 번식하지 못하도록, 즉 부패하지 않도록 진공이나 염도, 당도가 높은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게 3군의 조건이다. 공정 덕분에 식재료의 유통기한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 맛이 한층 더 좋아지기도 한다. 치즈를 포함해 소금에 버무린 견과류, 시럽에 담근 과일 병조림, 생선 통조림, 더 나아가 빵이나 케이크, 각종 과자류가 3군에 속한다.
첨가물 범벅인 초가공식품
4군은 초가공식품이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자연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산업적인 물리 및 화학적 공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첨가물을 동원해 만든 식품이 4군에 속한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초가공식품으로는 탄산음료가 있다. 탄산수에 과일을 모사한 향, 그리고 옥수수에서 추출한 액상과당을 더해 만든다.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산업적인 공정을 빌리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먹기도 어려운 음식이다.
액상과당 외에도 4군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몇몇 대표적인 첨가물들이 있다. 경화유나 변성전분 등인데 둘 다 온도에 상관없이 안정된 물성을 지닐 수 있도록 인간이 개발한 첨가물이다. 라면 면발이 예전처럼 시간이 지나도 잘 붇지 않는데 변성전분이 쓰인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라면이 어느 군에 속하는지 파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4군을 위한 첨가물 목록은 끝이 없을 정도로 길다. 옥수수에서 추출한 말토덱스트린이나 덱스트로즈, 전화당, 각종 단백질류, 밀가루의 쫄깃함을 책임지는 단백질인 글루텐, 유단백질인 카세인, 물에 타먹는 단백질 파우더의 원료인 유청 단백질 등에 요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재료를 물리적으로 섞어주고 그 상태를 유지해주는 각종 유화제가 초가공식품의 대표 첨가물로 유해성을 의심받고 있다.
한 달 동안 초가공식품 먹어봤더니...
그래서 초가공식품은 궁극적으로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초가공식품'(크리스 반 툴레켄 저)은 2017년의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평균 나이 30세의 남녀 20명이 4주 동안 영국 국립보건원 임상센터에서 생활했다. 10명으로 무리를 나눠 2주 동안 각각 초가공식품과 자연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였고, 2주 뒤에는 둘의 식단을 서로 바꾸었다.
의사이자 의학 전문 방송인인 저자 자신도 실험해 참가해 한 달씩 자연 식단과 초가공식품을 번갈아가며 먹었다. 그 결과 체중이 6㎏ 붇고 염증 표지인 C 반응성 단백 수치가 두 배로 뛰었다. 뇌 영상을 찍어보니 중독성을 보이는 패턴이 나왔다.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돼 '한국인의 식단이 위험하다'(2021)는 제목으로 KBS에서도 방영됐다.
한 달 동안 삼시 세끼를 맥도널드만 먹는 것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사이즈 미'와 같이 잠재적 위험이 있는 음식만을 줄곧 먹는 식단을 통해 위험을 증명하려는 방법은 최선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반 툴레켄이 제시하는 결과에도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극단적으로 발달한 과학과 기술 덕분에 존재 가능한 초가공식품은 궁극적으로 먹는 이를 위한 음식이 아니다.
정부 지원을 통해 미국의 옥수수가 과다 생산된 탓에 액상과당이나 말토덱스트린 같은 첨가물이 자리를 잡았듯, 초가공식품은 궁극적으로 소비자가 감지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맥락의 산물이다. 또한 잉여 식재료를 소진하거나 식품 관련 규제를 피하거나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생산자가 인위적으로 짜내듯 고안해낸 음식이기도 하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초가공식품을 웬만하면 피해야 할 이유가 매우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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