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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대가 '빠른 손' 뒤엔... 뜨겁고 숨 막히는 급식실

입력
2024.10.26 12:0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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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야기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스포일러(스포)’라 합니다. 어쩌면 스포가 될지도 모를 결정적 이미지를 말머리 삼아 먼저 보여드릴까 합니다. 무슨 사연일지 추측하면서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한 장의 사진만으로 알 수 없었던 세상의 비하인드가 펼쳐집니다.


23일 대구의 한 공립학교에서 23년차 조리사가 튀김 작업 이후 달궈진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이날 열화상 카메라로 측정한 결과 고무장갑의 온도는 55도까지 상승했다. 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공립학교에서 23년차 조리사가 튀김 작업 이후 달궈진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이날 열화상 카메라로 측정한 결과 고무장갑의 온도는 55도까지 상승했다. 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 조리실에서 조리사가 튀김 요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120도에 달하는 기름(흰색)의 영향으로 고무장갑을 낀 손 주변부도 80도가량(빨간색)으로 온도가 높아져 있다. 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 조리실에서 조리사가 튀김 요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120도에 달하는 기름(흰색)의 영향으로 고무장갑을 낀 손 주변부도 80도가량(빨간색)으로 온도가 높아져 있다. 최주연 기자


오늘 식단은 '중화비빔밥'. 튀김가루를 묻힌 돼지고기가 기름 솥 안으로 '풍덩' 하고 들어가니 기름 튀기는 소리와 함께 치솟은 희뿌연 연기가 위생모와 마스크를 착용한 조리사 얼굴 앞을 뒤덮었다. 조리사는 살짝 미간을 찡그릴 뿐 손을 멈추지 않는다. "서둘러 주세요!" 이곳은 유명 요리경연 프로그램 촬영현장이 아니다. 그보다 더 분초를 다투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학교 급식소다.

지난 8일 최종화가 공개된 넷플릭스 요리경연 시리즈 '흑백요리사'에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사 이미영(닉네임 '급식대가')씨가 본선에 진출해 화제가 됐다. 이씨가 주목받은 결정적인 장면은 팀 경쟁 미션이었다. 팀의 잘못된 판단으로 재료를 모두 새로 손질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씨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100인분의 재료를 50분 안에 완벽히 처리하며 팀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미슐랭 스타 셰프들도 감탄할 만한 솜씨였다.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조리사가 소스 조리를 하고 있다. 열화상 카메라에 감지된 가장 고온의 온도는 64.8도였다. 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조리사가 소스 조리를 하고 있다. 열화상 카메라에 감지된 가장 고온의 온도는 64.8도였다. 최주연 기자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23일 조리실무원들이 중화비빔밥 소스를 조리하고 있는 가운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대구=최주연 기자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23일 조리실무원들이 중화비빔밥 소스를 조리하고 있는 가운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대구=최주연 기자

많은 이들에게 '급식실 조리사'를 긍정적으로 각인시킨 장면이지만 그 이면은 그리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빠른 손'을 갖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열악한 학교 급식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조리실무사 2명과 120인분을 감당한 적이 있다"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갑·방수 앞치마 등을 착용하다 보니 여름엔 땀띠로 고생하는 날이 많았다"고 조리사 시절을 회상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은 전국의 학교 급식실 곳곳에서 오늘도 벌어지고 있다. '급식대가'들의 노동실태를 살펴보기 위해 대구의 한 고등학교 점심 조리 과정을 열화상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했다.

이날 메인 반찬은 부산의 한 시장에서 유행하고 있는 '돼지갈비맛 프라이드'였다. 재료를 튀기기 위해 끓인 120도의 기름은 열화상 카메라 속에서 용암처럼 춤을 췄다. 튀김망은 74.3도까지, 튀김망을 쥐던 고무장갑은 금세 53.9도까지 달궈졌다. 조리실 한편에선 톳 두부무침을 위해 톳을 데치고 있었다. 지름이 1m가 넘는 솥에 뜨거운 톳이 가득 담기니 이 또한 위험했다. 두 명의 조리원이 힘을 합쳐 옮기고 차가운 물로 식힌 뒤에서야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23일 조리사들이 찐 두부를 옮겨 담고 있다. 대구=최주연 기자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23일 조리사들이 찐 두부를 옮겨 담고 있다. 대구=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 조리실에서 조리사 2명이 데친 톳(노란색, 약 70도)을 솥에서 붓고 있는 가운데 톳의 열기가 조리사 주변 기온(보라색, 약 40도)도 높이고 있다. 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 조리실에서 조리사 2명이 데친 톳(노란색, 약 70도)을 솥에서 붓고 있는 가운데 톳의 열기가 조리사 주변 기온(보라색, 약 40도)도 높이고 있다. 최주연 기자



폐암이 원인이 될 수 있는 '조리흄' 또한 수시로 발생했다. 조리흄은 튀김, 구이 등 기름을 이용해 고온으로 조리할 때 발생하는 유해가스로 실내 환기가 어려운 조리시설 종사자들의 폐질환·폐암을 유발하는 1급 발암물질이다.

음식재료를 튀길 때도, 양념소스를 만들 때도 연기는 끊임없이 올라와 조리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이날 조리에 참여한 급식실 노동자 9명 중 3명이 폐에 3cm 이하의 혹이 존재하는 '양성결절'이 확인된 상황이었다.

조리사들은 가장 먼저 해결돼야 할 것은 인력 부족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대다수 학교 급식실에서 1명의 조리사·조리실무사가 100명 이상의 급식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오전 8시부터 점심시간 직전까지 숨 쉴 틈 없이 일하다 보면 산재가 일어날 확률도 자연히 더 높아진다. 인원이 확보되면 조리사 1인당 조리흄 노출 시간을 줄일 수 있기도 하다.

폐암이 산재 인정을 받으며 배기시설에 관한 논의도 시작됐으나 변화는 현장인 조리실까지 다가오지 못했다. 올해 4월 기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환기설비 개선사업 목표치를 달성한 곳은 총 884개교로 전체 목표치 대비 42.8%에 불과했다.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조리 후 세척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조리 후 세척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조리사가 세척을 하고 있다. 열화상 카메라에 감지된 가장 고온의 온도는 43도였다. 최주연 기자

23일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조리사가 세척을 하고 있다. 열화상 카메라에 감지된 가장 고온의 온도는 43도였다. 최주연 기자

전문가들은 구시대적인 젠더 편견에서 벗어남으로써 급식 노동을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사공준 영남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급식실 조리가 엄연히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손맛' '여성의 가사노동'이라는 관점 때문에 제대로 처우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 강도를 고려해 임금을 올리면서 노동구조 자체를 재편해야 한다는 대안이 제시된다. 사 교수는 "노동 집중시간인 오전엔 제조업 수준의 높은 강도의 노동"이라며 현재 최저임금 수준인 임금을 올리고 남성들이 유입될 수 있게끔 재편하는 등 인력난 해결 방법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23일 영양사가 식단표를 제작하고 있다. 대구=최주연 기자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23일 영양사가 식단표를 제작하고 있다. 대구=최주연 기자


최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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