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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러의 폭주, 그다음은 재앙이다

입력
2024.10.2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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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2019년 4월 25일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두 번째부터)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담하던 도중 의장대 사이를 지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AP 연합뉴스

2019년 4월 25일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두 번째부터)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담하던 도중 의장대 사이를 지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AP 연합뉴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낸 엄마는 잃을 게 없다. 악몽에 몸부림치다 결심한다. 나도 목숨을 걸겠다.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항의 편지를 쓰고, 모스크바 국방부 앞에 모여 현수막 시위를 벌였다. "전장에 끌려간 내 자식을 돌려보내 달라." 잃을 게 없어 두려울 것도 없는 여성들은 '집으로 가는 길'이란 이름의 작은 단체를 만들었다.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전쟁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는 푸틴은 이 단체 활동가를 스파이로 지목했다.

'전쟁은 전멸로 끝날 뿐, 승리로 끝날 수 없다'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장은 인간을 말려 죽이고 있다. 독재 회랑 속 몸을 숨기고 같은 인간을 사지로 내모는 권력자들 탓이다. 흑색 작전에 능한 푸틴은 러시아인 총알받이 모집에 어려움을 겪자 북한으로 눈을 돌렸다. 세계 2위 군사력을 보유했다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고전하고, 자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병력 수급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걸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모전 3년이다. 긴 전쟁에 장사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나오라. 넘어가지 말라. 힘들다야." 익숙한 북한말 억양이 러시아 훈련소로 추정되는 어수선한 공간의 공기를 가르고 있다. 이름은 '폭풍군단'인데 얼굴은 앳되고 몸집은 왜소한 젊은이 1만 명을 푸틴 손에 건넨 북한 김정은. 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죽거나 다친 러시아 병사가 어림잡아 70만 명이다. 북한의 미래를 '북러혈맹'에서 찾겠다는 김정은은 러시아에 적잖은 대가를 바라고, 선뜻 총알받이를 내준 고마운 북한한테 푸틴은 목숨 값을 치러줄 것이다. 비정하고 간교한 권력자들의 주거니 받거니는 그 자체로 재앙이다.

결사항전을 다짐한 중동의 권력자들도 다르지 않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제거된 수장 이스마일 하니예와 야히아 신와르를 순교자라 떠받든다. 순교자에 대한 모독이다. 하마스 대원과 민간인을 '인간방패' 삼다가 포위망이 뚫려 폭사한 것뿐이다. 신와르는 참극의 시작인 지난해 10월 가족과 지하 땅굴에 몸을 숨겼다. 거미줄 같은 땅굴망을 발밑에 두고 가자지구 거리에서 횡사한 이가 노소를 가리지 않고 4만 명이 넘는다. '전범'이란 오명을 개의치 않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그렇게 몰고 갔다.

지난 7월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오크흐마트디트 어린이 병원 건물 옆에서 한 여성이 부상당한 소녀를 업고 현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키이우=AFP 연합뉴스

지난 7월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오크흐마트디트 어린이 병원 건물 옆에서 한 여성이 부상당한 소녀를 업고 현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키이우=AFP 연합뉴스

히틀러 연구로 저명한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권력을 앞세워 20세기 유럽 정치사를 쓴 지도자들을 둘 중 하나로 분류했다. '유럽을 만들었거나, 혹은 파괴했거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야만의 시대' 중심에 파괴적 권력자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인데, 지금과 다를 게 없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으로 동북아 냉전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노골적인 침략 전쟁을 벌여온 푸틴과 러시아를 뒷배 삼아 핵무장에 매달리는 김정은이란 지도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미국은 대선을 코앞에 두고 중동과 러시아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는 전쟁이 짜증나고 버거운 기색이 역력하다. 북한군 파병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미적거렸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런데도 미국의 정세 관리 능력만 바라보며 두 지도자의 폭주를 속절없이 지켜보고만 있는 우리 신세가 처량하다.

조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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