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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살해 도구'로 쓴 가스라이팅 살인... 영등포 모텔 사건의 진실 [사건플러스]

입력
2024.11.02 16:00
수정
2024.11.0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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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및 심리성향 이용해 살인교사
치밀한 범행계획 및 사후 처리 지시
피해자와 재개발 보상 문제로 갈등
법원, 중형선고… 끝까지 혐의 부인

지난해 11월 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 영등포구 소재 숙박업소에 폴리스라인이 설치돼 있다. 박시몬 기자

지난해 11월 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 영등포구 소재 숙박업소에 폴리스라인이 설치돼 있다. 박시몬 기자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빨리 와주세요."

지난해 11월 12일 오전 9시 24분, 다급한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빌딩 옥상에선, 이 건물 주인 80대 A씨가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의 몸에선 흉기로 여러 차례 찔린 흔적이 발견됐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건너편 모텔 주차장 관리인 김모(32)씨를 피의자로 지목했다. 폐쇄회로(CC)TV 분석 결과, 김씨는 범행을 저지른 뒤 주차장에 돌아와 평소처럼 청소를 하고 태연하게 피묻은 옷을 갈아입었다. 김씨는 경찰이 출동하는 모습까지 꽤 오랜 시간 지켜본 뒤 현장을 벗어났다가, 사건 발생 약 12시간 만인 밤 9시 32분 강원 강릉 KTX역사 앞에서 붙잡혔다.

김씨는 지적장애인이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A씨가 평소 자신을 무시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단순한 감정 싸움에서 비롯된 범죄로 보기엔 미심쩍은 점들이 속속 발견됐다. "최근 주차장 임차와 관련해 김씨가 크게 상심한 상태였다"는 주변인 증언이 나왔다.

가해자와 피해자 외에 '제3의 인물'도 경찰 수사 선상에 잡혔다. 바로 김씨의 고용주인 모텔 주인 조모(44)씨다. 그는 김씨 동선이 찍힌 CCTV 영상을 모두 삭제했다.

대낮 서울의 한 숙박업소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 김씨는 정말 '무시 당했다'는 분노를 못 이겨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걸까. 조씨는 왜 종업원의 범죄를 숨기려고 CCTV 삭제라는 범죄(증거인멸)까지 저질렀을까. 모텔 주인이 수상했다.

"너와 난 가족" 심리적 지배

조씨로부터 지속적으로 심리적 지배를 받아온 김모(32)씨가 머무르던 서울 영등포구 소재의 모텔 주차장 옆 간이시설물. 박시몬 기자

조씨로부터 지속적으로 심리적 지배를 받아온 김모(32)씨가 머무르던 서울 영등포구 소재의 모텔 주차장 옆 간이시설물. 박시몬 기자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경찰 수사 내용과 판결문 등을 종합하면, 조씨와 지적장애 2급(정신 연령 5~8세) 판정을 받은 김씨가 처음 만난 건 2019년 5월이었다. 부친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집을 나와 떠돌던 김씨는 영등포역 인근에서 조씨와 우연히 마주쳤다. 조씨는 "난 널 믿고, 넌 날 믿고 그러니까 우리는 가족인 거야"라는 말을 하면서 김씨가 전적으로 자신을 따르게 했다. 조씨는 약 3년 4개월간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김씨에게 모텔 주차 관리 및 청소 등을 시켰음에도, 김씨는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친가족처럼 여겼다.

김씨에 대한 심리적 지배(가스라이팅)를 이어 온 조씨는 범행 전면에 그를 내세웠다. 조씨는 사건 발생 약 1년 5개월 전부터 "A씨가 네 여자친구를 강간했다" 등의 거짓말로 김씨에게 그에 대한 적대감을 심었다. 이후에도 'A씨가 주차장 부지 인도 소송으로 일터를 빼앗을 것이며, 유일한 수입원인 장애인 수급비를 받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말로 감정을 조종했다.

석 달 전부터 치밀한 살인 준비

범행은 치밀하게 계획됐다. 모텔 주인 조씨는 종업원 김씨에게 A씨의 동선을 계속 보고하게 하는 등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①범행 3개월 전부터는 김씨에게 신발 커버, 우비, 복면, 흉기 등을 차례로 구입하게 했고, 이 같은 범행 도구들을 쇼핑백에 담아 모텔 카운터 아래에 두게 했다. ②사흘 전엔 범행 직전의 행적을 확인할 수 없도록 CCTV의 방향을 돌려 놓고 ③당일에는 김씨에게 "피해자가 녹음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을 하지 말고 그냥 죽여라" "우비 등엔 피가 묻으니 가방에 담아 내 차 트렁크에 실으면 된다" 등의 지시를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증거 인멸 작업에서도 용의주도한 면모를 보였다. 조씨는 김씨 도주 장면이 찍힌 모텔 CCTV를 초기화했다. A씨를 살해하고 돌아 온 김씨가 모텔 내부에 흘린 피를 닦을 때 조씨 역시 모텔 출입문의 손잡이와 바닥 등을 닦고, 다른 모텔 직원인 안모씨에게는 신발 매트 세척을 지시했다. 범행 도구 등이 담긴 쇼핑백은 사건 당일 안씨를 시켜 모친과 공동 운영하는 서울 용산구 소재의 숙박업소에 가지고 가서 버리게 했다.

재개발 사업 둘러싼 경제적 갈등

국토교통부는 2020년 7월 영등포 쪽방촌 공공주택사업지역을 공공주택지구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뉴스1

국토교통부는 2020년 7월 영등포 쪽방촌 공공주택사업지역을 공공주택지구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뉴스1

조씨는 왜 김씨에게 맞은편 빌딩의 주인을 살해하라고 지시한 걸까. 문제는 '돈'이었다. 영등포 공공주택 재개발 사업의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조씨는 2021년 7월 재개발 지역 내 1,018㎡(약 308평) 상당의 토지를 가진 A씨와 보상금 관련 컨설팅 용역계약을 했다. 하지만 2022년 7월 A씨가 '수수료 산정'과 '수임 기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두 사람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검찰은 조씨가 추진하던 대토 보상 및 조합장 선출에 A씨가 반대한 후 갈등이 증폭됐다고 판단했다.

주변인들도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조씨는 대토 보상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A씨의 부동산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A씨는 주변에 "조씨에게는 절대 팔지 않겠다"고 말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A씨가 월 5,000만 원 상당의 대출이자 등을 부담하고 있던 데다 임차인들로부터 월세를 제때 받지 못해 현금 흐름이 좋지 않은 데도 이를 고수한 것을 보면, 조씨와의 갈등 골이 매우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차장 부지를 둘러싼 갈등도 있었다. 조씨는 2020년 7월부터 A씨 소유의 주차장을 빌려 사용했는데 재개발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자 30개월간 월세를 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A씨는 범행 발생 약 3개월 전 주차장 임대차 해지를 최종 통보했고, 한 달 뒤 인도소송을 제기했다.

조씨, 교사 혐의로 1심 징역 27년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법정에 선 조씨와 김씨는 살인교사 혐의를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펼쳤다. 각각의 재판에서 김씨는 "혐의를 인정하지만 저도 억울하다"면서 조씨가 범행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조씨는 "피해자를 살해할 만한 동기나 살해를 통해 얻을 이득이 없다"면서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1심 재판부는 이들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서울남부지법은 올해 7월 살인교사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씨에게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김씨에게 피해자에 대한 험담과 이간질을 해 반감을 품게 하고 범행을 결의하게 했다"며 징역 27년을 선고했다. 앞서 법원은 한 달 전 김씨에겐 "피해자에 대한 반감만으로 잔인하게 살해했고, 그로 인해 유족은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며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형 집행 종료일로부터 5년간 보호관찰을 명령했다.

피고인들과 검찰 모두 1심 결과에 불복했다. 조씨와 김씨는 선고를 받고 각각 이틀, 사흘 뒤 항소장을 제출했다. 검찰 역시 "자신을 가족처럼 신뢰하는 지적장애인을 교사해 고령의 피해자를 잔혹하게 살해하였음에도 범행을 전면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은 점, 유족들이 엄벌을 탄원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더 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조씨 판결에 대해 항소장을 냈다. 김씨에 대해서도 "구형한 20년보다 형량이 적은 데다 전자장치 부착명령도 기각됐다"며 항소했다.

김씨는 올해 9월 27일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새로 참작할 만한 사정 변경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원심과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조씨에 대한 2심 첫 공판은 같은달 25일 시작됐다.

김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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