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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빈민을 생각 없는 백조처럼 그렸다고?...풍경화를 보는 시선은 다양해야 한다

입력
2024.11.07 09:30
수정
2024.11.07 09:57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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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풍경화의 비밀(8) : 풍경화의 위기는 미술사의 위기?

편집자주

좋은 예술 작품 한 점에는 질문이 끝없이 따라붙습니다. '양정무의 그림 읽어드립니다'는 미술과 역사를 넘나들며 대중과 함께 호흡해온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여러분의 '미술 지식 큐레이터'가 되어 그 질문에 답하는 연재입니다. 자, 함께 그림 한번 읽어볼까요.


아름다운 자연이 담긴 풍경화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곳곳에 비밀스러운 문화 코드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풍경화 속엔 읽을 것이 넘쳐 난다. 미술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해 줄 풍경화 명작을 골라 10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의 화가 존 컨스터블. 위키피디아

영국의 화가 존 컨스터블. 위키피디아

한국에 겸재 정선이 있다면, 영국에는 존 컨스터블이 있다. 겸재 정선이 한국의 산하를 실감나게 그렸다면, 존 컨스터블은 영국의 산하를 실감나게 그렸다. 한 가지 차이라면 정선이 명승고적을 그렸다면, 컨스터블은 자기가 태어난 동네를 주로 그린 것이다.

겸재 정선(1676-1759)에 비해 정확히 100년 후인 1776년 영국 남동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존 컨스터블은 고향을 고집스럽게 그렸다. 사실 풍경화라 하면 누구나 이상향이나 가보고 싶은 유명한 산하를 그리려 했는데, 그는 자기 고향 주변의 이름 없는 풍경을 소재로 그려 결국 명성을 얻었다. 그는 평범한 영국의 자연을 위대한 풍경으로 격상시켰고, 바로 이 업적으로 오늘날엔 '가장 영국적인 화가'로 인정받는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컨스터블의 풍경화는 뜨거운 미술사적 논쟁에 휩싸였다. 그 평화로움 속에 산업혁명기 영국 농촌의 위기가 숨어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 그림이 지닌 영국적 가치를 지키려는 미술사학자와 이를 해체하려는 미술사학자들 간에 뜨거운 논쟁이 지난 50년간 계속되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풍경화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여러 작품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풍경화에 대한 이론적 논쟁을 한번 점검해 보고자 한다. 초가집과 시냇물, 그리고 숲과 벌판으로 짜여져 누가 봐도 뻔하다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화인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를 두고 벌어진 미술사학자들의 치열한 논쟁을 살펴보며 풍경화 읽기의 즐거움과 미술사의 학문적 매력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건초 마차'와 영국적 풍경화의 탄생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1821),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1821),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위키피디아

영국 서포크주 이스트 버그홀트라는 마을의 부유한 제분업자 집안의 자제로 태어난 존 컨스터블은 앞서 말한 대로 일찍부터 고향 풍경을 주로 그린다. 그가 45세 때인 1821년에 그린 '건초 마차'는 그의 고향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건초 마차'는 컨스터블의 아버지가 소유한 플랫퍼드 방앗간을 등지고 맞은편 농가를 바라봤을 때의 풍경이다. 참고로 그림 왼편의 농가는 컨스터블 집안의 소작농으로 일하던 윌리 롯의 집이다. 이 집은 지금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집 옆을 흐르는 개울 등 그림 속 풍경도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건초 마차'는 폭이 약 1.8m, 높이가 약 1.3m에 달하는 상당히 큰 그림이다. 실제로 이 앞에 서면 그림 속 풍경이 눈을 가득 채운다는 느낌을 준다. 보통 이렇게 커다란 화면에는 역사적 사건이나 위대한 인물을 그리기 마련인데 컨스터블은 지극히 평범한 자신의 고향 풍경을 그려 넣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전통 미술사적 해석: 케네스 클라크 vs 곰브리치

'건초 마차'의 왼쪽에 그려진 농가는 컨스터블 집안의 소작농으로 일하던 윌리 롯의 집으로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소작농의 집 앞에는 컨스터블의 아버지가 소유한 플랫퍼드 방앗간이 자리하고 있다. '건초 마차'에서 컨스터블은 이 방앗간을 등지고 맞은편 농가 쪽을 바라본 풍경을 그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건초 마차'의 왼쪽에 그려진 농가는 컨스터블 집안의 소작농으로 일하던 윌리 롯의 집으로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소작농의 집 앞에는 컨스터블의 아버지가 소유한 플랫퍼드 방앗간이 자리하고 있다. '건초 마차'에서 컨스터블은 이 방앗간을 등지고 맞은편 농가 쪽을 바라본 풍경을 그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제부터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놓고 벌인 전통적인 미술사학자와 신미술사학자 간의 논쟁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전통적인 미술사학자들은 컨스터블의 풍경화가 '자연의 묘사'라는 탐미적 성격과 구체적인 풍경의 묘사를 본격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근대미술의 정신성 또는 과학성을 보여주는 예로 보았다.

전통적인 미술사학계가 컨스터블에 대해 내린 우호적인 평가는 일차적으로 풍경화라는 회화 장르에 대한 순수한 해석에 근거한다. 대체로 그간 미술사에서 풍경화는 근본적으로 서사성이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어떤 회화 장르보다 정치성을 갖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 같은 풍경화에 대한 비정치적 해석은 대체로 케네스 클라크에 의해 주도되었다. 클라크는 풍경화를 '대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념의 변화를 보여주는 철저히 정신적인 세계의 표출'이라고 설명하였다. '건초 마차'에 대해 그는 "평정과 희망에 대한 영원히 감동적인 표현이 담겨있어 철학적 그림"이라고 평가하였다.

'서양미술사'로 익숙한 곰브리치는 풍경화를 자연이라는 외부 환경에 대한 화가의 시각적 실험으로 보았다. 그는 실제 풍경을 그린 실경의 등장을 순수 시각의 획득이자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이성의 표현이라고 평가하면서,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그것의 중요한 사례로 미화시켰다. 곰브리치는 컨스터블의 풍경화가 근경을 지리적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로 정밀하게 강조하고, 전경 인물의 행위와 도구를 정확히 묘사하고 대기의 변화와 채색까지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이전의 실경 풍경화와 구별되는 진일보한 실경 풍경화로 높이 평가했다. 서구 미술사학계는 대체로 풍경화가 관념에서 실경으로 발전한다는 모델을 세웠는데, 곰브리치는 컨스터블이 이러한 발전을 이끈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켰다.

새로운 해석: 존 바렐 vs 앤 버밍험 vs 앤드루 헤밍웨이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오일 스케치. 컨스터블은 원작을 그리기 전에 동일한 크기로 연습한 다음 그렸다. 이러한 오일 스케치에 높은 예술성이 담겼다는 해석도 있다. 위키피디아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오일 스케치. 컨스터블은 원작을 그리기 전에 동일한 크기로 연습한 다음 그렸다. 이러한 오일 스케치에 높은 예술성이 담겼다는 해석도 있다. 위키피디아

1980년대 이후 일련의 미술사학자들은 컨스터블 풍경화가 그려진 시기가 바로 탈농촌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던 19세기 초라는 점에서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당시 사회변화의 맥락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기성 전통적 미술사적 해석에 반기를 든 새로운 미술사적 접근 경향을 '신미술사(New Art History)'라 부른다. 이때부터 평화롭게 보이던 컨스터블의 풍경화는 신구 미술사학자들 간의 치열한 논쟁의 격전지로 변모하게 된다.

전통적 연구자들은 주로 컨스터블의 업적을 개인의 성취로 평가하면서 작가의 삶을 추적하는 데 집중하였다. 신미술사의 연구자들은 컨스터블의 생애를 당시 사회적 변화와 맥락에서 재조명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신미술사학자들은 컨스터블이 당시 농촌사회에 대한 지배층의 왜곡된 허위의식을 담는다고 보면서, 역사 발전에 역행했다고 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존 바렐 같은 문화이론가는 컨스터블이 실경을 의식적으로 추구하였지만, 당시의 불안한 농촌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었기 때문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컨스터블은 당시 농촌에 존재하던 빈민이나 노동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지는 않고, 대신 화면 뒤쪽에서 물러나 있도록 재구성하였으며 소박하고 아름답게 미화시켜 마치 이상향을 노니는 백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바렐은 '건초 마차'를 구체적인 장면을 그림에 담았음에도 구도상 클로드 로랭의 미화된 자연을 연상시키도록 철저히 연출시켰다고 보았다. '건초 마차'가 실경이 아니라 컨스터블이 꿈꾸는 이상적 농촌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관념적 풍경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앤 버밍험은 18세기 농촌 풍경화를 인클로저 운동에 의해 변형되어 버린 농촌사회에 대한 대리만족이라고 주장하면서 토지를 간접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풍경화의 유행에 일조한 것이라고 보았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이론을 받아들인 버밍험은 당시 풍경화를 급격히 변화하는 문화기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연출해내는 부르주아 계급의 기호 운영 방식에 따른 것으로 설명했다. 즉, 영국의 성장하는 부르주아는 농촌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도록 하여, 자신들의 존재도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꾸며졌다는 것이다.

앞선 두 연구자가 19세기 풍경화를 농촌사회의 변화와 연관지어 해석했다면 앤드루 헤밍웨이는 이를 철저히 도시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컨스터블의 작품은 런던 같은 영국의 대도시 계층을 위해 제작되었고, 정확히 도시의 문화계에서 평가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런던 미술계의 판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밍웨이는 '건초 마차'에 나오는 강을 비롯하여 컨스터블의 작품에 등장하는 운하와 노동 장면이 산업혁명 이후 국가의 부와 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내륙 항만 운송의 표현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상업활동에 적극 연관되는 강의 이미지는 근대화라는 당시 유행하던 환상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미술사의 '위기' 혹은 '존재이유'

컨스터블이 그린 'White Horse'(1820). 위키피디아

컨스터블이 그린 'White Horse'(1820). 위키피디아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놓고 벌인 전통적인 미술사학과 신미술사 사이의 뜨거운 논쟁의 승리자는 과연 누구일까. 양자 간의 타협 불가능한 해석을 놓고, 이제 '미술사는 학문적으로 끝났다'고 자조하던 학자도 있었다. 그런데 종말을 고한 건 다양성을 품지 못하고 반목하는 단조로운 미술사였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뜨거운 학문적 논쟁을 바탕으로 영국에서 미술사는 새롭게 업그레이드된다. 기성 미술사가 철학과 역사학에 바탕을 둔 인문학적 미술사였다면, 신미술사학 덕분에 이제부터 미술사는 사회과학적인 학문으로 지평을 더 넓히게 되었다.

이제 하나의 작품에 대해서도 다채로운 해석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컨스터블의 같은 전형적인 풍경화도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풍경화를 볼 때 수많은 해석 사이에 어딘가에 정답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상한다면, 우리의 풍경화 감상은 한층 더 흥미로울 수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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