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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20년 만에 첫 경력 단절…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요

입력
2024.11.17 13: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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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 가기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래픽=박구원 기자

평생 마케팅 담당자로 일해 온 40대 후반 여성입니다.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처음으로 경력 단절 시기를 경험하면서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회사를 그만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제게 회사를 그만두는 일은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커리어 플랜의 일환이었습니다. 스카우트 제안이나 확정된 다음 일자리 없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둔 것은 사회생활 20년 만에 처음입니다. 인생 최고의 실패를 경험한 기분이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그만둔 회사는 2년 6개월간 재직했습니다.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는 글로벌 기업이고 기존 직장보다 높은 직급이어서 기뻐하며 수락했는데 막상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이라는 중책을 맡으면서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업무 2개월 만에 제 능력 밖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인종의 동료들이 제가 제 역할을 못한다고 비난하는 걸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완전히 번아웃이 와서 그만뒀는데 평생 실패 없이 원하는 일을 거의 다 이뤄 왔던 터라 이번에는 커리어도, 인생도 실패한 것 같아 괴롭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은 결혼 후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을 다니다 교사가 됐습니다. 부산의 한 사립중학교로 부임하면서 결혼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주말부부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8년간 주말부부로 살았는데 이번에 제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부산으로 가족이 모두 이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으로 우울감과 불안감이 더 커진 것 같기도 합니다. 내 행복과 가족을 위해 가족이 모여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마음 뒤로 ‘내 인생은?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나는 그럼 어떻게 해?’라는 마음이 계속 남아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부산으로 완전히 이주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남편의 육아휴직 경험도 컸습니다.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지내니 달라지는 게 느껴져서 함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최근에는 가족이 유럽으로 길게 여행을 다녀왔는데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주말부부 생활을 청산해야 한다는 결심에 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남편의 육아휴직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라 내년 초로 이주 시기를 정하고 준비 중입니다. 이렇게 다 결정해 놓고도 여전히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되나, 한창 일해야 할 나이인데 이렇게 놔 버려도 괜찮나 하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능한 사람이었다가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위로받고 싶고 '부산에 가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듣고 싶기도 합니다. 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왔는데 번아웃을 핑계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스스로를 놔 버린 느낌이 들고 열심히 안 한 느낌도 듭니다. 주변에서는 재충전하고 새로운 길을 가라고 위로해 주는데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장 큰 바람은 우리 가족의 행복입니다. 부산에 가서 아이들도 잘 적응하고 저도 안정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습니다.

최은영(가명·47·프리랜서)

우선 경쟁 강도 높은 마케팅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은영씨에게 격려를 보냅니다. 은영씨와 같은 상황에서 불안을 겪는 것 자체는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지금 경험하는 이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이 불안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은영씨의 고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인생 최초의 좌절이라는 점입니다. 실패의 경험 없이 유능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이는 곧 은영씨가 지나치게 성취만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게 되었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실패와 좌절을 견디는 내성이 부족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은영씨 스스로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을 것이고, 주변에서도 은영씨를 높은 기대 수준으로 바라봤을 것 같습니다. 또 성공의 길만 걸어오면서 자신에 대해 성찰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진지하게 바라볼 기회가 없는 점이 오히려 약점이 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번아웃으로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내가 아프니 네가 힘들어져 회사를 그만뒀다"며 슬퍼했다고 상담신청서에 적었죠. 딸에 대한 기대가 높은 어머니에게는 딸이 회사를 그만두는 게 정말 큰일로 느껴졌던 듯합니다. 은영씨 자신도, 기대감을 가진 주변 사람도 은영씨의 실수나 실패를 크게 바라보고, 용납하지 못하며 살아 온 세월에 대한 방증으로 보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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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씨는 지금의 불안을 경력 단절 때문에 생긴 마음의 변화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번아웃이라고 판단한 결정적 계기는 새 업무를 맡은 지 2개월 만에 능력 밖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동료들의 비난을 듣게 된 일이었을 겁니다. 능력에 대해 자부심이 있고 항상 능력을 인정받아 온 은영씨에게는 존재감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이었을 거예요. "인생 최고 실패를 경험한 기분"이라고 묘사한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다음으론, 중년에 겪는 고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은영씨는 중년에 맞이하는 정체성 변환기인 '중년기 위기'라고 하는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40대 후반은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변화가 맞물리는 시기죠. 이 시기에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이뤄온 것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서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 쌓아온 성취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정체성 저하나 좌절감을 겪습니다. 그동안 원래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뒤로한 채 커리어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는데 앞으로 뭘 추구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겁니다. 은연 중 원했으나 미뤄 뒀던 꿈이나 근본적인 소망 등을 생각하는 시기인 것이죠. 이런 시기에 경력 단절을 맞으면서 고민과 불안이 더 커질 수밖에 없겠죠.

사실 이런 중년의 위기나, 지금까지 크게 겪지 않았던 실패를 마주하며 좌절과 불안감으로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람에게 불안의 마음이 찾아오는 것은 심리적 갈등이 있을 때 제대로 마주하라고 스스로에게 주는 신호니까요.

지금 겪는 불안을 잘 이해하려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제까지는 은영씨의 가치를 커리어 쪽에서 찾았다면 지금 시기를 경력 이외의 다른 가치를 발견할 기회로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경력은 은영씨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일 뿐이니까요. 은밀한 내 꿈이 뭐였는지도 되새겨 보세요. 중년에 겪는 정체성 변화와 혼란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현재의 꿈이나 바람을 가정의 행복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이미 은영씨 내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커리어보다 가족의 가치와 부부관계에 대한 생각, 또 이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오는 행복과 그것이 내게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만족감을 높이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가족관계에서 벗어나 그냥 나의 역할, 즉 은영씨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더 모색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바빠서 놓쳤던 나의 목표와 꿈, 취미, 관계 등이 될 수 있겠죠. 그동안 꼭 배우고 싶은 게 뭐였는지, 어떤 사회적 관계를 더 맺고 싶었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도 불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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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는 내 마음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게 필요합니다. 대개 성공과 성취를 반복한 사람은 자기 감정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기 싫은 마음, 부정적 감정은 뒤로 미뤄 두는 것이죠. 그만큼 성공에 가까이 가는 장점도 있지만 내 마음과는 멀어지는 어려움이 생기곤 합니다. 내 감정을 잘 느끼고 존중하고 살펴보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적 성취가 내 전부가 아니라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는 느낌을 알게 될 겁니다. 내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에게 집중해 보는 게 필요합니다. 감정 일기 형식으로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날것 그대로 적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내 역할이 무엇이고 뭘 해야 하는지보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자연스럽게 적어보는 것이지요. 소소한 취미를 갖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보는 등 내게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하는 게 아닌 본연에서 우러나오는 일을 찾아볼 것을 제안합니다.

지금의 불안감을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이 시기에 내 마음이 들려주는 신호의 의미로 잘 헤아려 보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혼란을 겪는 이 시기는 은영씨의 삶과 인생을 배우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은영씨 자신의 마음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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