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로 업주·건물주는 보상받고 떠나
성 노동자는 지원 못 받고 쫓겨날 처지
채무 독촉 끝에 숨진 여성도 있어
"성매매 벗어나도 살 수 있도록 지원을"
"우리 가슴속에 시커멓게 쌓인 사연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7일 오전 서울 성북구청 앞에 마스크, 선글라스 등으로 얼굴을 가린 여성 40여 명이 모였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나이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꽁꽁 무장했지만, 몸짓과 목소리에서 중년 여성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결, 투쟁'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빨간 머리띠, '생존권 쟁취'라고 적힌 어깨띠 등 여느 재개발 반대 집회의 풍경이 소복을 입고 등장한 대책위원장의 "언니들, 피켓 챙겨" 한마디에 사뭇 달라졌다. 곧이어 다 같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살고 싶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성북구는 이주 대책 강구하라!"
재개발이 한창인 서울 성북구 신월곡 1구역에 위치한 서울 강북의 마지막 성매매집결지 '미아리텍사스촌'.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발효와 집중 단속으로 점차 인적이 끊긴 뒤 현재 약 130명으로 추산되는 성 노동자만 남았다. 이주와 철거 날짜가 다가왔지만, 이들은 매주 목요일 아침마다 "우리도 살게 해달라"고 외친다.
이들이 이곳에 발이 묶인 것은 성 노동자들이 '이주보상비' 지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재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성매매 업주와 건물주는 이주보상비를 받고 떠났지만, 성 노동자는 마땅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에는 세입자나 주민이 아닌 근로자에게 정부나 지자체가 이주에 따른 손실보상금을 줘야 할 의무가 명시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성 착취로 배를 불린 포주들은 보상금을 받고 이주를 마친 반면, 성 노동자들은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다.
빚 독촉 받다 자녀 두고 사망한 동료 49재
생존의 위기에 몰린 여성들은 '불법 대부업체'에 손을 벌리기도 했다. 이날 집회에는 불법 대부업체의 협박에 시달리다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등진 성 노동자 A(35)씨의 49재 추모 행사도 진행됐다. 불법 대부업체 일당은 A씨가 돈을 갚지 못하자 A씨 딸의 유치원 교사 등에게 'A씨가 미아리에서 몸을 판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며 협박했다. 이처럼 벼랑 끝에 내몰린 성 노동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도록 임대주택 등 주거지와 재취업을 위한 일 경험 기회 등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40대 B씨는 "당장 나가면 발 뻗고 잘 곳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쭉 이곳에서 이 일만 하면서 살았는데, 나이 먹고 어떻게 새로운 일을 배워 먹고살지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정신병을 앓는 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10년째 미아리에서 일하고 있다는 C씨는 "이곳을 떠나 탈성매매를 하더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서울시와 성북구가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성 노동자 '매주 이주대책 마련' 촉구 집회
실제로 2017년 전주 선미촌을 해체한 전주시는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 1인당 생계비·주거비·직업훈련비 등 최대 2,700만 원을, 대구시도 2019년 성매매집결지 '자갈마당'을 폐쇄하면서 1인당 2,000만 원의 지원금을 지급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성북구는 경제적 지원을 위해선 통상 정비사업의 주도권을 가진 조합이 나서야 하고, 성 노동자 대부분이 음지에 있는 터라 발굴해 지원하기도 어렵다는 입장이다. 성북구 관계자는 "구 차원에서 실제 근로자들을 파악하고 접촉해 맞춤형 지원을 펼치는 게 쉽지 않다"며 "최대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비조합에 건의하고 중재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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