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황하 답사 ③남곽사, 수렴동, 이가용궁
당나라 시대 안녹산 반란의 와중에 가뭄까지 극심해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 시성 두보는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활로를 모색한다. 759년 간쑤성 톈수이에 왔다. 방랑 생활의 첫 기착지에서 100여 수의 시를 지었다. 천년 세월을 지켜온 남곽사에 자주 오르며 통한의 아픔을 참으며 고뇌했다.
산 정상에 위치한 남곽사에는, 북류천이란 샘물 하나 있네 山頭南郭寺 水號北流泉
오래된 나무는 대청을 비추고, 맑은 도랑은 마을로 흐르네 老樹空庭得 清渠一邑傳
가을꽃이 바위 아래 떨어지고, 저녁 풍광은 종 옆으로 눕네 秋花危石底 晚景臥鍾邊
순식간에 신세는 슬퍼만 지고, 시냇가 바람 휙 처량도 하네 俯仰悲身世 溪風爲颯然
두보
바람처럼 떠돈 두보의 흔적, 톈수이 남곽사
시내에서 위하(渭河)를 건너 약 2km 떨어진 야트막한 산자락을 오른다. 성곽 남쪽에 위치해 남곽사라 불렀다. 배산임수이자 양지바른 땅이다. 당나라 시대에 이미 관중평원 일대에서 유명한 사찰이었으니 1,600년의 역사를 지녔다. 두보만이 아니라 문인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산문에 이르니 아담한 단층 대문이 반겨준다. 서예가 조박초 필체의 간판이 보인다. 바로 밑으로 보이는 필체가 낯익다.
북송 서예가 미불의 필체인 제일산(第一山)이다. 미불이 왔다는 말은 구전에도 없는 듯하다. 왜 천왕전에 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당산을 비롯해 유명 현장에 자주 보인다. 너무도 유려한 필체이기 때문이다. 광서제 시대 1904년에 걸었다는 서명이 있다. 사찰의 명운을 대신하는 편액이다. 산을 사(寺)라 읽어도 좋으리라. 배불뚝이 미륵보살이 입을 벌리고 미소 짓고 있다. 사대천왕도 늠름하다.
동쪽으로 들어서니 두소릉사(杜少陵祠)가 나온다. 두보가 애강두(哀江頭) 첫 구절에 소릉야로탄성곡(少陵野老吞聲哭)이라 했다. 스스로를 소릉에 사는 늙은이라 겸양했다. 그렇게 별호가 됐다. 장안(지금 시안)에 있는 한나라 선제의 허황후 침궁이 소릉이다. 인근에 거주할 때다. 슬픈 현실로 인해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었다. 청나라 광서제 시대 세운 편액이다. 두보와 함께 두 아들 종문과 종무가 옆을 지키고 있다.
뒤쪽 숲에 두보의 추모 공간이 조성돼 있다. 바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으니 세상을 관조하는 모습이다. 슬픈 미소와 약간의 여유가 풍기는 조각상이 있다. 바로 옆에 길게 이묘헌비(二妙軒碑)가 설치돼 있다. 시와 필체 두 가지 모두 미묘하다는 말이다. 저자의 필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동진의 서예가인 왕희지와 왕헌지의 작품 속 필체를 골라 청나라 시인 송완이 만들었다. 두보의 시 60수를 새겼다.
시에 묘사된 오래된 나무는 측백이다. 춘추고백(春秋古柏)과 고수명목(古樹名木)이라 적혀 있다. 대웅보전 지붕을 넘을 듯 가지 하나가 쭉 뻗어 있다. 대청을 비추고 있다고 했지만 자신의 처지와 사뭇 비교하고 싶었으리라. 나뭇잎이 생기발랄하게 광채를 내고 있었을 듯하다. 마지막 구절에 쓴 '바람소리 삽(颯)'인 양 쇠락하는 몸을 이끌고 떠다닐 운명이었다. 겨우 3개월 머물다 남하를 거듭해 청두에 안착한다.
비단 물줄기보다 마애불, 우산 수렴동
위하 따라 서북쪽으로 100km 거리의 우산(武山) 수렴동으로 간다. 입구에서 전동차를 타고 협곡을 30분가량 들어간다. 첩첩산중 봉우리가 가로막고, 물길이 거의 마른 도랑 옆으로 뚫은 길이다. 위하 상류이자 실크로드 남부의 불교 성지였다. 6세기 북주부터 원나라까지 7개 사찰이 번성했다. 협곡 사이 험로는 실크로드와 통하는 길이었다. 지금은 사찰 터만 남았다. 지도에 납초사(拉梢寺)가 보인다.
아무리 봐도 사찰은 없다. 절벽을 타고 넝쿨처럼 오르는 나무줄기가 파란 하늘과 대비된다. 절벽을 돌아가니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이다. 거의 40m에 이르는 대불애(大佛崖)가 새겨져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부조 대불이라 한다. 붉은 사암이 세운 까마득한 절벽을 단장하고 거대한 불화를 창조했다. 고개를 드니 높이와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삼존불 상체와 아래쪽 조연들만 겨우 보일 뿐이다.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계단 따라 올라가니 대불 전경이 다가온다. 도대체 누가 엄청난 공사를 했을까? 꼭대기에 무언가 고정하고 줄을 매고 도공이 내려와 작업을 했을까? 곳곳에 작업판을 설치했을지도 모른다.
사찰 이름이 불현듯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키 작은 나무(梢)를 실어 날라(拉) 제작 환경을 만들었다는 힌트인가? 북주 시대 선비족으로 진주자사를 역임한 울지회가 559년에 제작했다. 당시 사회 혼란으로 생사의 기로를 자주 맞았다. 황실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부처에게 도움을 청했다. 거창한 불심을 선보여 모두 고난을 벗고자 했다.
석가모니는 36m다. 맥적산석굴에서 가장 높다는 대불의 거의 두 배다. 동그란 얼굴에 떨어져 나간 주먹 만한 코와 두툼한 입술과 길쭉한 귀, 또렷한 눈동자가 선명하다. 머리 뒤로 광배의 줄무늬가 광채를 띤다. 두 협시보살 외에 사자 6마리, 사슴 8마리, 코끼리 9마리가 배치돼 있다. 모두 혼연일체가 돼 부처의 권위와 지혜를 돋보이고 있다. 비와 눈, 바람에도 변하지 않고 1,500년 세월을 꿋꿋하게 버티며 지금에 이르렀다. 볼수록 자꾸 두 손을 모으고 싶은 명품이다.
협곡 맞은편 산에 있는 수렴동으로 간다. 계단 따라 30분가량 오른다. 대문을 지나 동굴 안으로 들어선다. 건물 사이 절벽 아래 동천선경(洞天仙境) 편액이 보인다. 높이 30m, 깊이 20m인 아치형 자연 동굴이다. 안쪽 구석을 찾아 바깥을 바라보니 하늘과 절벽이 드러난다. 우기에 물이 콸콸 떨어지면 구슬이 발을 드리운 듯해 수렴동이다. 아래에 물이 고이도록 담장을 쌓았다. 성스러운 수분을 담으려 현성지(顯聖池)라 한다.
동천선경 편액이 걸린 사성궁(四聖宮)으로 오른다. 복록수를 관장하는 삼성전은 많고 동굴에도 있다. 여성 신도가 도사와 함께 공양하는 중이라 들어가기가 어렵다. 마선낭낭(麻線娘娘)을 봉공한다. 신화의 여신인 서왕모의 제자다.
옛날 마에서 실을 잘 뽑는 아가씨가 살았다. 사방에서 혼인하려는 이가 많았다. 어느 날 청년이 구혼하러 왔다. 어머니 마음대로 정혼을 허락했다. 아가씨는 혼례일이 되자 실 끝을 대문에 단단히 걸고 붕 날아올랐다. 실이 날아가는 방향 따라 비상하며 추격자를 따돌렸다. 수렴동 방향으로 거침없이 달아났다. 실이 모자라 연화대에 도달하지 못했다. 주저 없이 창자를 꺼내 실과 연꽃을 연결했다. 좌정하고 신선이 됐다.
동굴에서 바라본 풍광이 멋지다. 지붕 윤곽 너머로 산자락이 펼쳐진다. 하늘과 구름은 담백한 느낌으로 그저 정지해 있다. 수렴동으로 소문난 관광지이지만 절벽에 그린 대불이 훨씬 볼만하다. 무얼 보러 사람들이 몰려올까 궁금하기도 하다. 동쪽 맥적산석굴과 서쪽 병령사석굴 모두 실크로드 세계문화유산이다. 유명세 없어도 숨은 문화유적이 생각보다 많다.
유명한 이씨(李氏) 다 모았다, 룽시 이가용궁
서북쪽으로 1시간을 이동하면 룽시(隴西)다. 남북경계선인 진령산(秦嶺山) 북단의 룽산 서쪽 지방이다. 예로부터 룽시 이씨는 유명했다. 오호십육국 시대 서량의 개국군주 이호가 있다. 물론 당나라 건국이 훨씬 큰 사건이다. 이가용궁(李家龍宮)에 도착한다. 입구 간판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친필이다. 종사(宗祠)가 황제의 작명으로 용이 됐다. 황궁처럼 건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627년 이세민이 내린 조서를 받들었다. 당나라가 멸망하자 훼손됐다가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중건했다. 2002년 완벽하게 보수해 지금에 이르렀다.
뿌리 근(根)을 새긴 바위가 나타난다. 뿌리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18개 필체로 이(李)를 새겼다. 글자마다 개성이 있어 한동안 서예가처럼 바라본다. 튼튼한 뿌리와 무성한 잎사귀처럼 보인다. 아무런 이유 없이 숫자를 사용했을 리 없다. 용궁 안에 크고 작은 용이 1899개 조각돼 있다고 한다. 딱 이해가 된다. 2만5,000㎡에 숨은 용을 다 찾았다는 말이다. 참으로 애쓴 발견이자 기발한 유추다.
현원전(玄元殿)에 이세민의 필체가 하나 더 있다. 성씨를 9개 등급으로 나누고 이씨를 1등급으로 하는 씨족지(氏族志)를 편찬하라 했다. 책자에 추본조원(追本溯源)이라 친히 4글자를 적었다. 성씨를 따라가서 근본에 도달하고 거슬러 올라 원천을 찾으라는 뜻이다. 필체가 속도감이 넘치고 활달하다. 이이(李耳)를 선조로 추인했다. 도덕경의 노자가 현원전의 주인이다.
이숭전(李崇殿)이 있다. 당 태종의 11대손으로 농서군 군수를 역임했다. 공적을 세워 작위를 받고 룽시 이씨의 시조가 됐다. 이전까지는 적도(狄道) 이씨라 했다. 농서당(隴西堂) 편액은 당나라 시대 서예가인 이옹의 필체다. 담장 쪽으로 전각이 5개 있다. 한가운데에 구룡전(九龍殿)이 있다. 용마루에 아홉 마리의 용이 이글거리며 날아오를 듯하다. 이세민이 앉아 있다. 천하제일의 성씨라고 으스대는 태도다.
조사전(祖師殿)도 있다. 도교에서 순양조사로 불리는 여동빈이 앉아 있다. 본명은 당나라 황실과 혈연관계인 이경(李瓊)이다. 늦깎이로 64세에 과거에 올랐다. 황소 민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살길을 모색했다. 산속 동굴에서 성을 여(呂)로 바꾸고 수도했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도교의 팔선 중 한 명이 된다.
수변루(戍邊樓)가 나타난다. 서한 시대 변방 보위에 공을 세운 이광을 봉공하고 있다. 옆 동네인 톈수이 출신인데 이씨이니 독립 전각을 가질만하다. 당나라 시인 왕창령은 출새(出塞)에서 비장(飛將)이라 치켜세웠다. 이광이 아직 살았다면 어찌 흉노족이 남하하겠는가 하는 한탄을 담았다. 늘 승전고를 울리던 장수였으나 포로가 됐다. 탈출 후 재기를 노렸으나 비운의 장군이었다. 제때 전장에 도착하지 못한 죄를 묻자 스스로 목을 벴다. 톈수이 남곽사 부근에 이광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 장제스가 1934년에 쓴 한장군이광지묘(漢將軍李廣之墓) 비석이 놓여 있다.
멀리 이가용궁 대전이 보인다. 이옹 필체인 농서당도 훨씬 큼지막하다. 이층에 이세민의 추본조원도 가져왔다. 황제에 올랐거나 신화 인물 중 이씨를 다 모았다. 족보와 초상화, 조각상과 연보가 뒤섞여 있다. 이씨 역사의 현장이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그런지 가볍게 둘러본다. 종사 크기만큼 제례 규모가 정해지는데 어찌 감당할지 모를 일이다. 걱정할 일은 아니다. 50위안을 받는 4A급 관광지라 알아서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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