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절대 조사 불가'에서 돌연 입장 바꿔
전현직 대통령 세력 간 갈등 때문으로 풀이
두테르테 "죽기 전에 빨리 조사하라" 배짱
필리핀 정부가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낳은 로드리고 두테르테(79) 전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과 관련, 국제형사재판소(ICC)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수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조사 절대 불가’ 방침을 고수하던 태도에서 180도 바뀐 모습이다.
14일 영국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필리핀 대통령실은 전날 성명을 내고 “ICC가 인터폴에 두테르테 전 대통령 적색수배를 요구하고 인터폴이 수배 조치를 내리면, 필리핀 법 집행 기관은 전면적으로 협조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인터폴 적색수배는 살인·강도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발부하는 국제 수배 통지다. 필리핀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 수사 협조 의사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2016~2022년) 중 대대적인 마약 범죄 소탕 작전을 주도했다. 마약 범죄 연루가 의심되면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하는 것도 눈감았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대거 발생했다. 현지 정부는 6,00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했다.
그러나 국제인권단체는 사망자 수가 최대 3만 명일 것으로 본다. 특히 빈곤층 젊은 남성들이 주로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거물 마약상보다는 동네 마약상을 집중 단속하며 ‘묻지마’ 사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ICC는 2021년 두테르테 정권의 행태를 '반인륜 범죄'로 규정하고 정식 조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테르테 당시 행정부는 물론, 이듬해 취임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행정부도 이를 거부해 왔다. 올해 3월까지도 마르코스 대통령은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협력하지 않겠다”며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필리핀 법무부 역시 “우리는 식민지가 아니다”라면서 외부 기관의 필리핀 형사사법 시스템 관여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는데, 반년 만에 입장을 바꾼 셈이다.
필리핀 정부의 ‘변심’은 전현직 대통령 간 불화 때문으로 풀이된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와 러닝메이트를 이뤄 당선됐다. 그러나 수개월 전부터 마르코스 행정부의 반(反)중국 행보, 개헌 추진 등을 두고 양측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의 이번 발표에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같은 날 하원에서 열린 마약과의 전쟁 조사 청문회에 출석한 그는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내가 한 행동은 나라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오히려 “ICC는 내가 죽기 전에 빨리 나를 수사하라. 감옥에서 썩을 준비가 돼 있다”며 비꼬기까지 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 지지 세력도 거세게 반발했다.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은 이번 결정을 ‘정치적 박해’로 규정한 뒤 ‘협조 불가’ 방침을 밝혔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