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K페미니즘' 수출? 트럼프 시대, 한국 태생 '4B 운동'이 주목받는 이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K페미니즘' 수출? 트럼프 시대, 한국 태생 '4B 운동'이 주목받는 이유

입력
2024.11.17 07:00
0 0

트럼프 당선 이후 美 SNS에서 퍼진 '4B'
"한국 여성들처럼 연애·성관계 거부하자"
트럼프 2기 낙태권 등 여성 권익 후퇴 우려
다만 한국 4B 운동 성격과는 차이점 보여
"4B, 미국 주류 문화로 확산되진 않을 듯"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에서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이 자신의 머리를 자르며 연애, 성관계, 출산, 결혼을 하지 않는 '4B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6일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센터에서 당선 연설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선 후보. X 캡처, 웨스트팜비치=AFP 연합뉴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에서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이 자신의 머리를 자르며 연애, 성관계, 출산, 결혼을 하지 않는 '4B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6일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센터에서 당선 연설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선 후보. X 캡처, 웨스트팜비치=AFP 연합뉴스

"더 이상 머리를 염색하거나 기르지도 않을 것이고, 꾸미지도 않을 것이고, 뷰티 산업에 돈을 쓰지 않을 거예요. 이런 일은 여성 혐오와 가부장제를 도와주니까요. 여러분도 남자와 데이트하지 말고, 성관계도 갖지 마세요."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이 자신의 머리를 가위로 짧게 자르면서 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에서 26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이 여성이 설파하는 메시지,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2018년 즈음 국내에서 번지기 시작한 '탈코르셋 운동'(여성에게 암묵적으로 강요된 미적 기준을 거부)과 '4B 운동'(비연애·비성관계·비출산·비결혼)과 매우 흡사해서다.

실제 4B 운동은 '4B movement'라는 단어로 불리며 미국 SNS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CNN 등 현지 주요 매체들도 이 현상을 앞다퉈 보도할 정도다. 한국 태생의 페미니즘 운동인 4B 운동은 어떻게 이역만리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일까.

트럼프 재집권이 불 댕긴 4B 운동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전 대통령이 6일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대선 승리를 선언하고 있다. 연단 뒤쪽에 서 있는 인물은 그의 아내 멜라니아 트럼프. 웨스트팜비치=AFP 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전 대통령이 6일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대선 승리를 선언하고 있다. 연단 뒤쪽에 서 있는 인물은 그의 아내 멜라니아 트럼프. 웨스트팜비치=AFP 연합뉴스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말은 '트럼프 재집권'이다. 5일(현지시간) 미국 대선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난 뒤 구글에서 4B 운동 단어 검색량은 5,000% 이상 폭증했다. 미국 여성 유권자들이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으로 자신들의 권익이 후퇴할 수 있다고 느꼈고, 이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한국의 4B 운동을 채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성 혐오 발언을 이어가거나, 자신의 성추문 사건을 돈으로 입막음하려다 유죄 평결을 받은 사실 등도 여성 유권자들의 반발심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 여성들이 아예 출산을 하지 않겠다며 '성관계 파업'까지 언급하는 상황은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이뤄진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와 관련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미 연방 대법원이 임신중지(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판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1기 시절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잇달아 임명하면서, 연방 대법원은 2022년 6월 임신중지권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반세기 만에 폐기했다. 이로 인해 이번 대선에서 여성들이 출산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쟁점으로 떠올랐고,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이를 여성 표심을 공략할 대표 의제로 삼았다.

한국과 미국의 4B 운동은 다르다

2016년 5월 17일 김성민이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발생 다음 날 시민들이 강남역에서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5월 17일 김성민이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발생 다음 날 시민들이 강남역에서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같은 배경 때문에 미국의 4B 운동이 한국과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4B 운동에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짙게 반영돼 있다는 분석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최근 반복되는 교제 살인 등으로 인해 여성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풍토가 4B 운동의 주된 토대가 됐다는 진단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안전하지 않은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 등에서 비롯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과 상관없이 해외 외신 등이 수년 전부터 관심을 보여왔던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교수는 "서구 사회의 경우 성소수자들이 결혼할 권리, 가족을 구성할 권리 등을 위해 싸워온 것과 반대로 한국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을 권리를 외치는 현상이 해외에서는 독특한 운동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2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드라마 '시녀 이야기'에 등장하는 빨간 망토 복장을 한 여성들이 임신중지권 폐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1985년 출간된 '시녀 이야기'는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집권한 가상의 미국에서 여성들이 강간과 출산을 강요받으며 잔혹하게 억압받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공상과학 소설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5일 당선을 확정 지으면서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덴버=AFP 연합뉴스

2022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드라마 '시녀 이야기'에 등장하는 빨간 망토 복장을 한 여성들이 임신중지권 폐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1985년 출간된 '시녀 이야기'는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집권한 가상의 미국에서 여성들이 강간과 출산을 강요받으며 잔혹하게 억압받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공상과학 소설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5일 당선을 확정 지으면서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덴버=AFP 연합뉴스

특히 미국 내에서 세계 최저 수준인 한국의 출산율이 4B 운동에서 기인했다는 일각의 해석이 나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4B 운동에 동참하자는 미국 여성들 중 일부가 한국의 저출산 현상은 4B 운동 덕분이라며 미국에서도 성관계 파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는 우리나라의 저출산 현상이 보다 복합적인 요소에 기인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인선 부산대 여성연구소 교수는 "미국에서는 '성의 변증법'을 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여성들이 임신·출산에서 해방되어야만 진정한 성평등이 이뤄진다고 주장하는 등 1960, 70년대부터 자유롭게 출산할 권리나 성관계 파업이 페미니즘 담론으로 오랜 기간 논의돼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이와 비교해 한국의 저출산 현상은 현재 청년세대의 생존 고민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남녀임금격차 등 복합적인 이유가 원인이 됐다"고 강조했다.

아직까지는 미국 내 4B 운동이 여성 유권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확대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박홍민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정치학과 교수는 "미국 여성들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반감을 갖고 있고, 사회문화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미국 동부의 여성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4B 운동이 언급된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여전히 미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균열 구조는 젠더가 아닌 보수-진보의 경제 이데올로기와 인종이라는 평가가 다수다"라고 설명했다.

이현주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