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예한 정치갈등·장기 국가전략 부재에
과거 경제 성공 공식마저 개혁 장애물로
‘풍요·민주화 역설’ 풀어낼 개헌 착수를
“한국 정부와 기업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란 기대가 해외 투자자들 사이에서 점점 줄고 있다.” 얼마 전 금융투자업계 전문가에게 한국 증시 침체 원인을 묻자, 돌아온 답변이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한국이 세계적 기술 강국으로 발돋움하던 시기 작동했던 성공 동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가는 기업의 현재 가치보다는 미래 성장 가능성이 더 많이 반영되는데, 한국 경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면서 한국 기업 주가도 약세를 면치 못한다는 진단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4월 ‘한국의 경제 기적은 끝났나?’라는 기획 기사에서 과거 한국 경제성장을 주도해 온 제조업과 대기업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는 개혁이 성공 못 해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이 협력업체 희생을 통해 높은 이윤을 올리는 제조업 생태계가 고착돼 대부분 협력업체는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동력의 80% 이상을 고용하는 중소기업의 생산성은 낮고 혁신이 느려져 임금도 제자리걸음이다. 반면 국민의 6%만 고용하고 있는 대기업은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절반을 창출하는 이중적 경제구조가 점점 더 공고해지며 불평등이 심화했다. 그 결과 대기업 취업을 원하는 젊은이들 사이 경쟁이 치열해지고 나아가 결혼·출산율도 떨어지며 저성장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던 대기업마저 혁신이 사라지고, 국제경쟁력을 잃어가면서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았다. FT는 “한국 경제 개혁이 어려운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과거 모델이 너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강의 기적’이 바로 오늘날 경제 개혁을 막는 원인이라는 지적에서 우리는 당면한 개혁이 얼마나 어려울지 실감할 수 있다. 문제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해결책을 놓고는 사사건건 대립하고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성공의 역설’을 고민해 온 국내 학자들이 모여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리가 지난 14일 열렸다. ‘혁신적 품격사회로’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고등교육재단 창립 5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이다. 참여 학자들은 과거 성공 요인이 현재 위험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선 1970·80년대 산업화와 2000년대 적극적 무역자유화로 1인당 국민소득은 높아졌지만, 그 과정에서 양극화가 격심해지고 경쟁이 격화되면서 그로 인해 분노와 고립의 갈등 그리고 높은 자살률, 초저출산을 초래했다. 이것이 ‘풍요의 역설’이다. 이런 ‘풍요의 역설’ 해결을 위해 정치의 조정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와 이에 따른 개헌으로 채택한 단순 다수 선거제도로 인해 승자독식과 소수의견 배제가 굳어졌다. 또 어떤 정파도 책임을 지기에 충분한 권한을 갖지 못해 정부 시스템이 마비되는 ‘비토크라시’까지 초래하고 있고, 그사이 관료는 정치화했다. 또 5년 단임 대통령제는 단기 대증적 정책만 늘어나고 국가적 장기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이는 ‘민주화의 역설’이다. 이런 성공의 역설로 고통받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심포지엄 참가 학자들은 ‘승자독식 균열 사회’라고 이름 붙였다.
승자독식 균열 사회 극복의 출발점은 여야 첨예한 대결이 비토크라시로 이어져 결국 마비 상태에 이른 ‘87년 체제’ 개혁이다. 마침, 지지율이 추락한 윤석열 정부가 난국을 돌파할 방안으로 개헌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다. 그 개헌은 임기 단축 같은 정국 전환용이 아니라 선거제를 포함, 현 체제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을 담아야 한다. 실현 가능성은 회의적이지만 만에 하나 현 정부가 ‘성공의 역설’을 탈출할 개헌에 나선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물론 국가 전체에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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