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과중 시달리는 '학폭 심의' 담당자들]
국민신문고 민원 폭탄, 상급기관에 감사 요청
학폭에 대한 징벌주의·강경 대입 대책 등 영향
중복 신고로 업무 지연... 심의 기간 준수 못 해
스트레스 극심해진 담당자들, 휴직·사직까지
#1. 경기 지역 교육지원청에서 1년여 동안 학교폭력(학폭) 사건 심의 업무를 담당 중인 장학사 A씨는 "악성 민원이 최대 고충"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심의 과정이나 결과에 불만을 느낀 학부모가 주변 지인들을 동원해 국민신문고에 민원 폭탄을 넣는 일이 잦다"며 "특히 '매우 불만족'을 표시한 민원은 재답변까지 일일이 달아야 해 담당자들이 매일 각개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2.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모 지역 교육지원청에서 학폭 심의 업무를 맡았던 장학사 B씨는 최근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까다로운 민원이 얽힌 학폭 심의 사건을 맡은 이후 스트레스가 심해져 정신과를 찾아야 했다"며 "이후 비슷한 내용의 사건이 접수되면 우선 정신과 약을 먹고 업무에 임했다"고 털어놨다.
교육청·교육지원청의 학폭 심의 담당자들이 과다 신고, 민원 제기, 소송 비화 등으로 심각한 업무상 고충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학폭 사건에 대한 학부모·학생의 민감도가 높아지고 특히 예민한 입시 문제와 결부되면서, 사건 심의 절차 진행이라는 본업무 외에 다양한 민원 대응 업무가 담당자에게 가중되고 있는 형국이다.
20일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실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과 산하 교육지원청에서 학폭 업무를 담당하는 장학관·장학사·주무관 등 765명을 상대로 최근 3년간 업무 실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학폭 심의와 관련한 공식적 민원 및 소송 제기만 총 150건이 넘었다. 이로 인해 업무 담당자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은 물론 휴직·사직하는 사례까지 나왔다. 학폭 심의 업무가 과중해지면서 사건 처리가 기한 내 처리되지 않은 일도 허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인 동원해 국민신문고 폭격... 동일 사건 수차례 재신고까지
교육부가 발간한 '학폭 사안처리 가이드북'에 따르면, 학폭 신고가 접수된 이후 학교에서 자체 해결 및 관계 회복이 어려울 경우 각 교육지원청에 심의 요청을 하도록 돼 있다. 이후 교육지원청이 사건을 접수해 학교폭력심의위원회(학폭위)를 개최하고 조치를 결정한다. 학폭 사안 처리에 교육청·교육지원청이 주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특히 올해부터는 사건 조사 업무도 개별 학교에서 교육지원청으로 이관됐다.
이들 기관의 학폭 심의 담당자들은 업무 수행에 어려움을 주는 외부 요인으로 △언론보도 147건 △법적 소송으로 인한 분쟁 98건 △국민신문고 및 정보공개 과다청구 58건 △기타 34건을 꼽았다. 유형은 달라도 사건 관계자들이 제기하는 악성 민원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담당자들의 진술이다. '기타'에는 경남 교육지원청의 학폭 담당자가 살해 협박을 받은 사례도 포함됐다. 원하는 심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상급·유관기관에 감사 요청을 넣은 사례도 △교육부 17건 △감사원 1건 △국가인권위 14건 △기타 10건으로 적지 않았다.
중복 신고도 심의 업무 과중의 주요인이다. 3년간 무고 등을 이유로 상대 학생을 맞신고한 '쌍방 사안'만 해도 초·중·고 각각 1,301건, 1,819건, 828건으로 집계됐다. 이미 신고가 접수됐음에도 갈등이 추가로 불거졌다며 재신고를 한 사건도 초·중·고 각각 14건, 27건, 19건이다. 장학사 B씨는 "동일 사건 신고가 5, 6차례 거듭 들어올 때도 있었다"며 "담당자들 사이에선 '동일 신고 2회 이상부턴 심의비를 받아야 할 지경'이란 푸념도 나온다"고 말했다.
현장에선 학폭 처리를 두고 징벌주의 인식이 강화되면서 중복 민원·신고가 늘어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B씨는 "학부모·시민들의 엄벌주의 관점이 강해져 심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솜방망이 처벌'이란 반발이 나오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국 10대 교육대학에서 학교생활기록부에 학폭 이력이 적힌 수험생 지원을 제한하는 등 관련 대입 대책이 강화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A씨는 "특히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 학부모들은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악성 민원을 넣는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학폭 심의가 법정 기한을 넘기는 일이 흔하다. 교육부 지침상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는 28일 이내에 개최돼야 하지만, 기한을 넘긴 사건은 최근 3년간 초·중·고 각각 1,236건, 2,409건, 806건에 달했다. A씨는 "담당자들이 과다 민원으로 인한 가욋일을 처리하다 보면 심의에 지연이 생기는 건 불가피하다"고 했다.
담당 교원 정신적 피해 심각... "유사한 심의 접수되면 약 먹어"
이런 환경은 학폭 업무 담당자들의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현황 분석 결과, 정신과 치료 경험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 41명(5%)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치료 경험 응답을 제출하지 않은 경우를 고려하면 실제 비율은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3년간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담당자가 휴직·사직한 사례도 각각 3건 있었다.
심의 결과에 불복해 이뤄지는 각종 법적 조치가 담당자들의 심적 부담을 키운다는 지적도 나왔다. A씨는 "학폭 심의 결과에 불복할 경우 행정심판이나 행정소송을 거는데 최근 교육지원청을 상대로 제기된 행정심판·행정소송의 90% 이상이 학폭 심의 관련"이라며 "특히 행정소송은 일부 규모가 큰 교육청을 제외하고는 담당자가 직접 소송 수행자로 나서야 해 심적 압박이 더 심하다"고 말했다. 담당자 개인에 대한 고소·고발도 5건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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