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세안과 트럼프 인연과 악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내년 1월 또다시 백악관에 입성하게 되면서 동남아시아 각국은 ‘트럼프 2.0’이 자국과 지역 전반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대 관심사는 트럼프 시대가 불러올 경제 여파다. 트럼프 1기 당시 미중 무역 갈등 속 글로벌 기업들이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채택하며 동남아가 공급망 다각화 혜택을 봤던 만큼, 이번에도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이 나온다. 동시에 트럼프 당선자의 관세 부과 공약이 동남아에까지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연일 쏟아지고 있다.
다만 새 미국 정부가 내놓을 동남아 정책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8년 전 트럼프와 동남아 관계를 비춰볼 때 그가 자국은 물론 지역 자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 양극화 해소 등 미국 내치는 물론 중국 견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갈등처럼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트럼프 당선자가 과연 동남아까지 눈을 돌리겠느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존재한다. 트럼프 1기(2017~2021년) 당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그리고 각국과 트럼프 당선자의 인연을 살펴봤다.
동남아 주도 회의 모두 '패싱'한 트럼프
1기 트럼프 행정부 4년간 미국의 대(對)동남아 정책은 ‘무관심’에 가까웠다. 다자협상보다 양자협상을 선호했던 트럼프는 아세안이 주도하는 다자기구에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은 임기 첫해인 2017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행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세안 정상회의 직후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는 아예 불참했다. EAS는 아세안 10개국과 한국·미국·중국·일본·인도·호주·뉴질랜드·러시아가 참석하는 인도 태평양 국가 사이 회의체다. 트럼프는 당초 EAS 참석을 일정에 끼워 넣긴 했지만 회의가 늦게 시작된다는 이유로 돌연 전용기를 타고 떠나버렸다.
그는 이듬해부터 아세안 정상회의도, EAS도 모두 ‘패싱’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지역 내 민감한 현안이 산적했는데도 미국 정상이 불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심지어 대리인조차 ‘급’에 맞지 않는 인사를 보냈다. 예컨대 2019년 트럼프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와 EAS에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보냈다. ‘정상’ 회의에 부통령도 아닌 장관급 참모를 보낸 셈이다. EAS 15년 역사상 미국 최하급 관료의 참석이었다.
2018년부터는 주아세안 미국 대사 자리도 비워 뒀다. 그만큼 동남아에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회원국의 실망은 날로 커졌다. 당시 지역 내에서는 미국의 동남아 경시가 도를 넘는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두 번째 임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싱가포르 싱크탱크 ISEAS 유소프 이샤크 연구소는 “동남아는 트럼프 2.0 시대 미국 외교 정책 의제에서 우선순위가 될 가능성이 낮다”며 “트럼프가 개인적으로 동남아에 무관심하고 다자주의에 회의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아세안) 정상회의에 4년 더 불참하거나 동남아 지도자들과 직접 교류하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과거 미국과 동남아의 불편한 관계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발행한 ‘아시아 브리프’에서 “동남아 국가의 미국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또 한 번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동남아=트럼프·김정은 ‘만남의 장소’
그나마 트럼프 당선자가 재임 기간 직접 찾은 동남아 국가는 베트남(2017·2019년), 필리핀(2017년), 싱가포르(2018년) 정도다. 총 네 차례의 동남아 방문 가운데 두 번은 북한과 관련 있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초대형 이벤트였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를 만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싱가포르가 북미 공히 거부감이 없는 제3 중립국인 데다, 지리적으로 양국 정상 이동과 경호가 용이하고 각종 국제대회 경험이 많은 점이 정상회담 장소 결정 과정에서 강점으로 꼽혔다.
2차 북미 정상회담(2019년 2월 27~28일) 장소도 역시 동남아 국가 베트남이 낙점됐다. 베트남은 북한대사관이 위치하는 등 북한과 친분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나라인 동시에, 과거 미국의 적대국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군사·경제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점이 유효하게 작용했다는 평가다.
트럼프 당선자와 김 위원장은 1차 북미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평화 체제 구축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미군 유해 송환 등 4개 항에 합의하는 이른바 ‘싱가포르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회담이 결렬되면서 이후 양국 관계는 지금까지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세기의 회담’을 연 싱가포르와 베트남 두 나라는 유·무형 이익을 얻었다. 싱가포르의 경우 적대 국가 간 담판 장소를 처음 제공하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외교 중립국’이라는 상징성을 얻게 됐다. 베트남도 ‘가난한 공산국가’가 아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모두로부터 존중받는 균형외교의 대표주자이자 대형 이벤트를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성장 가능성 높은 신흥 국가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생겼다.
트럼프 당선자가 백악관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베트남 내에서는 벌써부터 그가 재집권 후 대화 장소로 제3국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자국이 또다시 물망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 섞인 관측도 나온다.
베트남 일간 뚜오이쩨는 지난 16일 콘스탄틴 수코베르코프 러시아 국제관계위원회 소장의 발언을 인용, “베트남은 향후 트럼프 당선자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중요한 회담을 주최할 수 있는 국가 중 한 곳”이라고 보도했다.
매체는 “인도, 이집트, 남아프리카, 브라질 등에서 (만남이) 이뤄질 수 있지만 모든 국가가 이처럼 중요한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곳은 아니다”라며 베트남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북미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열었다고 부연했다. 물망에 오를 만한 국가 중 자국이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자평한 셈이다.
’아시아의 트럼프’ 두테르테와 브로맨스
필리핀과의 관계는 ‘인연’이자 ‘악연’이었다. 트럼프와 비슷한 기간 재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2016~2022년) 전 필리핀 대통령과의 만남은 성사(2017년 11월 아세안 정상회의)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거침없는 발언과 돌발행동으로 각각 ‘아시아의 트럼프’, ‘미국의 두테르테’라는 별명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두테르테가 주도한 마약과의 전쟁을 여러 차례 칭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친밀함 때문인지 두 사람은 임기 초반 ‘브로맨스'(남성 사이 진한 우정)를 과시했다. 두테르테가 트럼프 앞에서 노래를 부른 일화는 유명하다. 정상회의 직전 열린 만찬에서 트럼프가 옆자리에 앉은 두테르테에게 노래를 요청하자 두테르테는 현장에 있던 필리핀 가수 필리타 코랄레스와 즉석에서 필리핀 대중가요 ‘당신(Ikaw)’을 열창했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필리핀이 경제·안보 분야에서 중국과 밀착하며 ‘친중 노선’으로 갈아타고, 미국과 거리 두기에 나서면서 양국 관계에는 이상기류가 형성됐다. 미국 정부가 2019년 필리핀 인권 문제를 이유로 두테르테 측근의 미국 입국을 막자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두테르테는 2019년과 2020년 트럼프의 방미 초청을 모두 거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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