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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원의 비극

입력
2024.11.2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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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한 사채업자가 운영하는 불법 추심 인스타그램 계정. 인스타그램 캡처

한 사채업자가 운영하는 불법 추심 인스타그램 계정. 인스타그램 캡처

불법 추심 취재를 맡은 후배에게 인스타그램 계정 주소 하나를 받았다. 사채업자가 온전히 추심만을 위해 개설한 곳으로 보였다. 성별도 나이도 다른 40명의 얼굴이 그야말로 '박제'돼 있었고, 각자 자필로 쓴 차용증을 카메라를 향해 보여주며 그 내용을 읊었다. 주민번호 같은 개인정보가 빼곡히 담긴 차용증의 한 대목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빌린) 금액: 20만 원, 금액: 40만 원, 금액: 50만 원. 그 이상은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업체는 채무자의 지인들 번호를 받아다가 막무가내로 괴롭혔다. 해당 계정 링크를 지속해서 전송하는가 하면, '돈을 갚으라고 전하라' '당신 개인정보도 팔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그 대상은 친척으로, 직장 동료로, 자녀 학교 교사로 뻗어나갔다. 실제 돈을 갚으면 게시물이 사라지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50만 원을 빌리고 아직 못 갚았단 이유로 감내하기엔 너무 가혹한 일로 보였다.

불법 추심에 시달리다 숨진 30대 싱글맘의 노트 속 '고 부장 40만 원' 같은 문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 사례를 통해 더 깊이 새겼다. 벼랑 끝에서, 혹은 멋모르고 손을 뻗은 곳에서 만난 사채업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채무자들의 목을 죄고 있다. 수십만 원을 빌렸을 뿐인데 원리금이 금세 불어나 수천만 원 수준이 되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눈앞은 암흑처럼 깜깜해졌을 것이다.

얼마 전 공개된 통계는 또 하나의 위태로운 신호를 준다. 올해 7월 기준 20대 신용유의자(옛 신용불량자)가 6만5,800명으로, 2021년 말에 비해 25%나 늘었다는 내용이다. 같은 기간 전 연령에선 8% 증가한 점을 고려하면 20대의 빚 부담은 유독 많이 불어났다. 이제 막 사회로 나선 청년의 발목을 잡은 빚 규모는 대체로 많아야 수백만 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불황을 먹고 사는 불법 사채업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 취약 계층을 추심의 굴레로 빠트릴까. 아니나 다를까 경찰이 올해 열 달 동안 집계한 불법사금융 피해는 지난해보다 58%나 늘었고, 환수된 범죄수익도 169억 원으로 지난해(37억 원)보다 4.6배 치솟았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본인이 피해자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현실과 미래를 동시에 잃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불법 추심에 꽤나 무뎌졌다. '돈을 빨리 갚으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 속에 이 문제를 가둬두고 쉬쉬해왔기 때문이다. 경찰이 '싱글맘 사건'의 지인으로부터 일찍이 신고를 받고도 곧바로 수사에 착수하지 않은 데에는 이 같은 인식이 반영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행법이 빚 독촉 방법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추심 연락을 할 수 있는 시간대까지 버젓이 정해놨는데도 말이다.

관계 당국이 일제히 불법사금융을 엄단하겠다고 나섰지만 공들여야 할 지점은 하나 더 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곳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례들을 그저 개인의 사연으로만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다. 어떤 제도의 사각지대가 그들을 내몰았는지,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면 그 이유는 뭔지, 신용불량 낙인이 한 청년의 선택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두루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싱글맘 사건'은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비극이다.

신지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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