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9 클레버링가 강의- 2
클레버링가는 자신의 강의가 미칠 개인적 재앙을 각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아내와 함께 그날 저녁 간소한 짐을 쌌다. 그리고 이틀 뒤인 28일(일부 기록에는 27일) 체포돼 네덜란드 국방군과 레지스탕스들이 ‘오랑제(Orange) 호텔’이라 부르던 헤이그 셰베닝겐 감옥에 수감됐다. 그가 끌려간 소식이 알려지자 헤이그를 비롯한 여러 대학 학생들이 동맹 휴업을 감행했고, 정부는 대학들을 전면 폐쇄했다. 학교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문을 열었다.
클레버링가는 8개월 만에 석방됐지만, 44년 초 레이던 시민 31명과 함께 다시 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시 도시를 거점 삼아 활약하던 네덜란드 국가사회당 소속 레지스탕스에 대한 보복-압박을 위한 인질로 체포된 거였다. 44년 7월 다시 석방된 그는 영국 런던의 네덜란드 망명정부가 종전-해방 후 권력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직 정치인과 레지스탕스 대표 등으로 구성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college van Vertrouwensmannen)’에 합류했다. 한 전기작가는 당시 그 조직에 합류하는 것도 40년 11월의 연설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종전 후 대학으로 복귀해 58년 은퇴했고 그해 미국 정부의 ‘자유 메달’을 받았다.
에두아르트 메이어스도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살아남아 해방을 맞이했고 45년 6월 대학에 복직했다. 그는 48년 네덜란드 왕실 요청으로, 오늘날 네덜란드 민법의 기초가 된 새로운 민법을 정초했다.
레이던대는 매년 11월 26일을 전후해 레이던대 출신 학자들이 주축이 돼 세계 여러 지역에서 ‘클레버링가 미팅’이란 이름의 학회를 연다. 예컨대 2024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미팅’의 주제는 로마 제국 초기 그리스 지식인들이 제국을 비판하며 혐오감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한 문학적 기법이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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