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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노년·건강 챙기는 청년…뒤집힌 무해 소비가 뜬다

입력
2024.12.02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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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우리 사회의 핵심 키워드는?


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여성팬들이 지난 10월 26일 광주KIA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4 KBO 한국시리즈 4차전 KIA-삼성 경기에서 응원을 하고 있다. 광주=뉴스1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여성팬들이 지난 10월 26일 광주KIA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4 KBO 한국시리즈 4차전 KIA-삼성 경기에서 응원을 하고 있다. 광주=뉴스1

2024년 한 해도 우리는 역대급으로 역동적인 시간을 보냈다. 여름엔 사상 가장 뜨거운 날의 기록을 연달아 경신했고 사회 문화 트렌드 역시 대한민국 특유의 역동성과 역량을 바탕으로 ‘열풍의 시간’을 보냈다. 푸바오를 시작으로 탕후루, 요아정(요거트 아이스크림의 정석), 두바이 초콜릿, AI 의대 레트로 열풍이 그랬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가 열광하는 것을 들여다보면, 가장 부족하고 결핍된 요소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다가오는 2025년 대한민국을 지배할 핵심 트렌드와 키워드는 어떤 것일까?

옴니보어·퍼레니얼... '고정관념'의 종언

주어진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옴니보어(omnivore)'가 화두다. 옴니보어의 사전적 의미는 잡식성(雜食性)으로, 사회학적으로 특정 문화에 얽매이지 않은 채 폭넓은 문화 취향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옴니보어가 많아지는 배경은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인구구조가 급격하게 변화하며 △라이프스타일이 매우 다양해지는 데 기인한다. 그래서 연령이나 성별을 기준으로 한 인구학적 전형성은 점점 옅어지며, 자신의 개성과 관심에 기반한 확고한 취향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진다.

라이프 사이클도 뒤섞이면서, 전형적인 삶을 따라가는 순차적 인생 모형은 종언을 고하고 있다. 그래서 ‘인생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는 말도 옛말이 됐다. 결혼ㆍ출산 시기도 너무 다양해져서 어린이집, 키즈카페, 초등학교 입학식 등에 가면 학부모 나이가 20~50대까지 다양하다.

마타기 스나이퍼스

마타기 스나이퍼스

젊고 활동적인 시니어도 많아지면서 세대와 나이가 역전되는 현상도 확산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평균연령이 67세에 이르는 e스포츠팀 '마타기 스나이퍼스'가 뛰어난 게임 실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반면 젊은층에서는 미리미리 건강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얼리 케어 신드롬'이 확산된다. 뷰티 영역에서도 '안티 에이징'에 이어 '슬로 에이징'이 부상한다. 슬로 에이징은 젊을 때부터 노화를 최대한 늦추겠다는 '저속 노화' 열풍의 뷰티 버전이다. 미국 20대 사이에서는 잔주름 예방 목적으로 소량의 보톡스를 주사하는 '베이비 보톡스'가 유행이다.

성별 고정관념도 깨지고 있다. 올해 한국 프로야구 티켓 구매자 중 54.4%가 여성으로 조사됐다. 또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프로축구와 배구, 농구도 팬 성별 비중을 조사한 결과, 여성이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여성들은 발레나 요가를 즐긴다”는 말도 옛말이 됐다. 오히려 클라이밍, 크로스핏, 인터벌 트레이닝 등 격렬한 운동을 즐기는 여성이 크게 늘었다.

마우로 기옌 교수의 '퍼레니얼' 책 표지

마우로 기옌 교수의 '퍼레니얼' 책 표지

마우로 기옌 교수는 개인과 사회 모두 낡은 규범, 구시대적 제도에서 벗어나 퍼레니얼(perennial)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퍼레니얼은 다년생 식물로, 한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에도 계절이 바뀌면 다시 싹을 틔우는 식물을 의미한다. 이런 시대에 기업과 조직은 기존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새로운 상식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개인 역시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는 과감한 사고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아보하', 아주 보통의 하루

너무 행복하지도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이 소중해졌다. 그저 무난하고 무탈한 삶이 더욱 가치 있게 다가오는 시대다. 충격적인 사건·사고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고, 사회·경제적으로도 계급 사다리가 무너지며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노력해도 어렵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인생 녹음 중' 유튜브 캡처

'인생 녹음 중' 유튜브 캡처

그래서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장난감을 모으며, 맥주 한 잔에 스포츠 중계를 시청하는, 각자의 일상을 즐기는 안온한 하루에 감사해한다. 채널을 개설한 지 1년도 안 돼 구독자 100만 명을 돌파한 '인생 녹음 중'은 주요 콘텐츠가 평범한 부부의 일상 대화다. 부부가 아침에 일어나 건강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또 운전을 하면서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 서로 주고받는 노래, 설거지하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 과자 먹는 소리 등 특별한 배경음악도 없는데도 사람들은 이들의 평범한 일상에 집중하며 깊이 공감한다.

취미 생활도 남에게 ‘보여주기’가 아닌 소소한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들이 뜬다. 뜨개 용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뜨개 전문점'이나 '뜨개 카페'가 늘어나고, 화려한 글씨체 솜씨를 자랑하던 캘리그래피보다 좋은 글귀를 손수 꼭꼭 눌러쓰는 필사에 집중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일본에서는 20대를 중심으로 동네 목욕탕 즐겨 찾기가 유행하면서 '레푸기움(refugĭum)'이라는 단어가 화제다. 라틴어로 피난처, 은신처를 뜻하는 단어로, 원래 의미는 빙하기 등 극한 상황에서도 동식물이 살아남는 장소를 뜻하는데, 이제는 ‘치열한 도시생활 속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녹록지 않은 오늘날 '아주 보통의 하루'가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없이 소중해진 것이다.


무해함 전성시대

작은 것, 귀여운 것, 서툴지만 순수한 것들이 사랑받고 있다. 해로움이 없고, 자극이나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며, 굳이 반대하거나 비판할 이유를 주지 않는다. 이렇게 무해한 사물의 준거력(Referent power·사람을 따르게 하는 힘)이 강해지는 현상을 '무해력'이라고 지칭한다. 전 국민을 사로잡은 푸바오와 레서 판다, 밤톨이 햄스터 같은 깜찍한 동물들, 미니어처 굿즈, 대충 그린 이모티콘, 서툰 한국어 말투의 아이돌 등이 그렇다.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의 쌍둥이 동생 루이바오와 후이바오가 10월 15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에버랜드 제공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의 쌍둥이 동생 루이바오와 후이바오가 10월 15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에버랜드 제공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단지 귀엽거나 예뻐서가 아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유해한 것들에 대한 심리적 위협이 커지고 있다. ‘코로나 블루’라는 우울증이 점점 확산되더니 최근에는 ‘코로나 레드’라는 우울을 넘은 분노의 수준으로 악화되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긁힌 세대'라며 심리적 갈등과 스트레스를 표출한다. 이러한 암울함의 반작용으로 무해한 대상을 찾으며, 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안전지대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무해함(Do No Harm)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이 원칙은 원래 코로나19 백신 개발 과정에서 백신 안정성의 원칙으로 적용됐다. 이후 인공지능, 생명과학, 환경보호, 자율주행 자동차 등 여러 영역에서 윤리성의 핵심 기준으로 확대된다. 위험사회로 지칭되는 현대사회에서 무해함의 원칙은 우리의 안전을 담보하는 매우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동물원 레서 판다. 뉴스1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동물원 레서 판다. 뉴스1


나다운 자기계발, 원 포인트 업

‘나다운 성공’이 주목받고 있다. 정답도 중요하지만 나만의 답 내기 과정에 더 의미를 둔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다움’을 잃지 않은 채 성공의 길에 이르는 것이 자기 계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나 잘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면 된다'라는 펭수의 말을 되새겨 봄 직하다. 자기 계발의 목적은 ‘새로운 강점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할 수 있는 잠재력 영역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취업에서도 공채·특채 못지않게 '컬처핏'(조직문화 적합도)이 강조되고 있다. 직장을 찾을 때 자신의 특성에 잘 부합하는 기업에 구직활동을 한다. 이제 나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느 회사에 지원해야 합격 확률이 높아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기업 내에서 실시하는 직원 코칭이나 멘토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컬처핏

컬처핏

성공의 기준도 제각각이 됐다. 자기 계발 서적도 성공을 위한 일반화된 지침을 제시하기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부동산으로 100억 벌기' '주식으로 경제적 자유 얻기' 같은 원대한 목표를 설정한 도서가 인기였지만, 이제는 '부업으로 100만 원 벌기' '투잡으로 월 80만 원 더 벌기' 등 지금 당장 시도해 볼 수 있는 작은 성공 담론이 대세다.

원대함이 사라진 시대에서는 개인의 생존 전략이 중요해진다. 놀랄 만한 성장이나 벅찬 감동을 주는 성공보다는 매일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과정 속에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이 더 중요하다. 내가 제자리에 멈춰 있지 않고 매일 ‘원 포인트 업’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 오늘 실천 가능한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작은 루틴을 실천하는 데 만족하며 매일의 성장 일지를 기록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자기 긍정주의'가 확산되고, 오늘 하루가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았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다.

이준영 교수는?

서울대 소비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한국소비문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2017년 한국소비자학회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트렌드코리아 2010~2025' 시리즈(공저), '1코노미', '코로나가 시장을 바꾼다' 등이 있다.


이준영 상명대 교수·트렌드코리아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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