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바탐(BATAM)
겨울이 그렇게 올 줄은 몰랐다. 수도권에 유례 없는 폭설이 내린 지난달 27일 인천공항에서 오후 5시 45분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가 2시간 지연됐다는 문자가 왔다. 미뤄진 시간에도 탑승구는 열리지 않고 다시 1시간 30분 늦어진다는 안내 문자가 울렸다. 그사이 대합실 창밖으로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치고 이례적 폭설이라 비행이 취소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상황이었다.
애초보다 4시간 늦게 비행기에 올랐지만 기체의 눈을 제거하느라 이륙하기까지는 또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살을 에는 한겨울 추위도 이렇게 닥치려나. 6시간 40분 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인도네시아 바탐, 북위 1도 부근 적도의 땅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남국의 온기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낭만과 자유 넘치는 열대의 붉은 땅
한국은 겨울의 문턱, 바탐은 우기로 접어든다. 여장을 푼 래디슨호텔 건너편 고급 주택가는 정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감싼 안개는 쉬 흩어지지 않고 나무 덤불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아주 느리고 느긋하게 열대우림의 신비로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탐은 제주도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130여 만 명이 살고 있다. 1만8,000여 개 섬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에서는 점 하나로 표시되는 작은 섬이다. 싱가포르와 여객선으로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 주말이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생필품을 사고 레저를 즐기려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인이 몰린다. 특히 일상 규범이 엄격한 싱가포르인에게는 해방구 같은 곳이다. 덕분에 바탐은 인도네시아에서 발리와 자카르타 다음으로 생활 수준이 높은 곳이라 자랑한다. 싱가포르까지는 3개 선사에서 한 시간 간격으로 페리를 운항하고 있다.
바탐은 또 하나의 발리를 꿈꾼다. 6개 골프장이 있어 한국인도 주로 골프를 목적으로 이 섬을 찾는다. 레저휴양시설로 가장 자랑하는 곳은 남쪽에 딸린 작은 섬 라노아일랜드다. 배로 20여 분 이동하면 하얀 산호 백사장에 야자수가 자라는 전형적인 동남아 휴양지 해변이다. 여행객은 노천 카페에서 나른하게 맥주를 마시거나 바나나보트와 스노클링 등 해양 레저를 즐길 수 있다.
잔잔한 적도의 바다는 하늘을 그대로 담는다. 잔뜩 흐린 하늘에도 구름의 농도는 달라 회색, 흰색, 검은색의 뭉게구름이 수면에 아른거린다. 기대했던 쪽빛 바다는 보지 못했지만, 같은 잿빛이라도 다양한 층위로 표현되는 남국의 풍광이 과감한 유화 같고 섬세한 수채화 같다.
바탐은 섬 전체가 경제특구라 시내 곳곳이 공사 현장이다. 편도 5차선 도로가 갑자기 2차선, 1차선으로 줄어들기 일쑤고, 그 혼잡한 도로를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활기차게 누빈다. 바탐은 벽돌이라는 의미의 ‘바타메라’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토양과 암석이 황토색이라 공사장마다 붉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섬에서 시내권 관광지로 손꼽는 곳이 중국식 불교사원이다. 겉도 속도 한국의 사찰과는 많이 다르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불당은 전통 동양식 건물이 아니라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본당에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불이 모셔져 있고, 중정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또 두 개의 불당이 있다. 한쪽에는 수염을 쓰다듬는 관운장이, 다른 쪽에는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관우를 부처로 모신 법당 내부는 삼국지의 주요 장면을 묘사한 석판으로 장식돼 있어 마치 소설을 주제로 한 전시장 같다. 사찰 마당에는 동양철학의 간지에 등장하는 12동물을 동자승과 함께 익살스럽게 표현해 놓았다. 유불선에 소설까지 혼합된 특이한 사찰이지만, 진리를 갈구하고 가족의 안전과 건강을 기원하는 사부대중의 욕망이 적절하게 투영돼 있다. 사찰 일대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갖춘 화교 커뮤니티다. 바탐 인구의 30%는 중국계로 실제 이들이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다. 바탐 시내에 수많은 이슬람 사원 중에서도 그랜드모스크가 대표적이다. 그냥 대사원(MASJID AGUNG)으로 불리던 모스크는 2년여의 보수 공사 끝에 지난 9월 라자 하미다 대사원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라자 하미다(RAJA HAMIDAH)는 리아우링가 왕국 술탄의 부인으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위협 속에서 말레이 풍습을 굳건히 지킨 여성으로 평가되는 영웅이다. 왕국의 주권 수호에 앞장선 여성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작명이다.
새로 개장한 만큼 모스크는 산뜻하고 웅장하다. 입구 계단을 올라가면 하얀 대리석이 깔린 넓은 바닥이 펼쳐진다. 역시 하얀 외벽에 짙은 남색으로 장식한 돔 지붕이 대리석 바닥에 신기루처럼 투영된다. 양쪽의 넓은 회랑과 예배 시간을 알리는 황금색 첨탑(미나렛)까지 화려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갖췄다. 무슬림이 아니면 예배당 내부는 들어갈 수 없지만 이슬람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바탐의 랜드마크다.
바탐 시내 가장 중심부는 ‘나고야시티’로 불린다. 옛날 일본의 군사기지로 개발된 지역이지만 현재는 중국계 차지다. 나고야는 기지 공사 당시 일본인 노무자들이 퇴근 후 자주 가던 식당이었다고 한다. 엄연히 ‘루북바자’라는 지명이 있지만 현재는 관광객도 주민들도 나고야라는 명칭에 더 익숙해졌다.
이곳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평일 오전 1시, 주말 2시까지 열리는 야시장 때문이다. 고기 굽는 연기와 맛있는 냄새가 풀풀 풍기는 여느 동남아 야시장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여러 식당이 테이블이 놓인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깔끔한 현대식 건물이다. 건물 외벽에는 유명 맥주 브랜드 간판이 경쟁하듯 걸렸고, 감성 알전구가 은은하게 광장을 밝힌다. 광장은 일종의 공동 식당인 셈인데, 매일 밤 맥주를 마시는 이들로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술에 엄격한 무슬림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왁자지껄하다. 낭만과 자유가 넘치는 광장에서 맥주 한 잔으로 여행의 피로를 풀기 좋은 곳이다.
순수한 미소, 발레발레 원주민마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발레발레 원주민 마을이었다. 바탐은 대규모 공장이 많아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난 섬이다. 오래전부터 거주하던 소위 ’원주민’은 전체의 20% 정도에 불과하다.
발레발레는 바다 건너 도심 풍광이 보이는 한적한 시골이다. 야자수 숲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 동화 속 풍경 같다. 버스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여행객을 반기는 건 똘망똘망하고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눈망울이다.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녀 성가실 법도 하지만, 천진한 웃음소리에 오히려 생기를 얻는다. 카메라를 들면 기꺼이 포즈를 취하고, 수줍어하면서도 모델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돈 많은(?) 관광객에게 뭔가를 빼먹겠다는 영악함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순수한 마을이고 순박한 사람이다.
주변 환경도 아이들의 재잘거림만큼이나 생기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 앞 해변에는 맹그로브 한 그루가 우산살처럼 바다에 뿌리를 펼치고 있다. 한국의 당산나무처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같다. 해변 양쪽은 울창한 맹그로브숲이다.
작은 쪽배가 덤불을 헤집고 이동한다. 가까이 다가가니 한 어민이 금방 잡은 게를 들어 올리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마을에서는 하루 2회 관광객을 위해 전통 춤 공연을 펼친다. 정성에 비하면 크게 감흥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맹그로브숲 에코투어 프로그램이 있다면 더욱 흥미를 끌 것 같다. 해변에서 약 300m 떨어진 바다에 해산물식당이 있다. 식당까지 연결한 목재 덱이 자연스럽게 해상 산책로 역할을 한다. 조금은 투박하지만 오히려 현실감 있고 정감 가는 길이다.
인근의 투리비치 리조트는 작은 발리로 불린다. 투리(TURI)가 꽃을 의미한다니 태안의 꽃지해변처럼 바다와 작은 섬의 조화가 아름다운 곳이다. 낮은 언덕에 위아래로 자리 잡은 독채 빌라는 발리에 흔한 리조트처럼 대나무지붕으로 마감했다. 객실과 수영장 곳곳에는 힌두사원에서 볼 수 있는 동물 석상을 배치했다. 해변 바로 앞 작은 섬은 힌두사원 모양의 카페로 꾸몄다. 카페에서 바다로 길게 뻗은 선창이 또 사진 포인트다. 바다 건너 약 15㎞ 떨어진 싱가포르가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제주항공이 지난 10월 16일부터 주 4회(수·목·토·일) 인천~바탐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싱가포르에서 하루쯤 시간을 내 다녀오는 곳이었는데, 이제 바탐에 숙소를 잡고 싱가포르로 여행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싱가포르에 비해 음식값과 호텔 투숙비가 저렴해 그만큼 비용을 아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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