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준수와 국가 보위를 국민 앞에 서약한 현직 대통령이 헌정질서를 유린한 참담한 밤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벌인 비상계엄 선포(3일)·해제(4일) 사태로 대한민국은 계엄 선포 명분으로 그가 내세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4일 국무위원과 대통령 비서실장·수석비서관 전원이 사의를 표명해 행정부가 리더십 공백 상태에 빠졌고,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6개 야당은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민주당은 탄핵안의 국회 표결을 7일 자정까지 속전속결로 마치겠다는 태세다. 국민이 국정 마비와 국가안보 위험을 심각하게 우려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윤 대통령은 3일 오후 10시 29분 긴급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4일 오전 1시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자 오전 4시 27분 계엄 해제를 선언했다. “굴욕적으로 끝난 셀프 쿠데타”라는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의 3일(현지시간) 평가처럼 위헌적이고 반민주적일 뿐 아니라 국민에게 공포를 안긴 6시간이었다. 국민들은 “나라가 망하냐”는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대통령은 헌법 수호의 최고 책임자다. 윤 대통령은 이번 계엄 사태로 헌법을 위반했다. 헌법이 규정한 계엄 선포 요건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로, 윤 대통령이 제시한 정부 관료 탄핵 소추안 22건 발의, 내년도 정부 예산안 삭감 등 거대 야당의 의회 폭주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헌법학자들의 중론이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이 국회, 지방의회, 정당의 정치활동을 일절 금한 것도 위헌 소지가 크다. 헌법은 계엄 발동 시 행정부와 사법부 권한에 대한 특별조치를 허용했을 뿐, 입법부는 예외로 뒀기 때문이다. 국회 장악을 위해 계엄군이 창과 문을 부수고 국회 본청에 난입해 본회의장 등을 포위한 것은 경악스러운 장면이었다. 일부 계엄군은 민주당 대변인과 시민들에게 총구를 들이댔고, 민주당은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체포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윤 대통령이 꿈꾼 대한민국의 모습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헌법과 계엄법은 계엄 선포와 변경 시 국무회의 심의를 거칠 것과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할 것을 명시했지만, 적법 절차가 지켜지지 않은 정황도 드러났다. 윤 대통령 측근인 김용현 국방부 장관 등 극소수 인사들이 계엄을 주도한 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사실이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 대통령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을 벌인 것은 계엄을 정치적 난국 타개의 승부수로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치권의 대체적 해석이다. 이번 사태가 윤 대통령의 국가관과 상황판단력의 수준을 여과없이 드러낸 것이다.
윤 대통령은 4일 한덕수 국무총리,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 여권 인사들을 만나 야당 폭거를 막기 위한 계엄 선포는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태의 엄중함을 여전히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국민 신뢰와 통치 능력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상실했다. 남은 임기 2년 5개월간 그에게 대한민국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 ‘계엄의 밤’을 거치며 확인된 민심이다. 국민의힘에서도 탈당과 탄핵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탄핵안의 국회 본회의 가결 요건이 국회의원 200명 이상의 찬성인 만큼 소속 의원이 108명인 국민의힘에서 최소 8명의 이탈표가 나오면 가결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7년 만에 비극이 재현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탄핵 정국 통과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 이후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이 나오기까지는 3개월이 걸렸다. 보수진영조차 "국익을 위해 하야를 통한 질서 있는 퇴진을 끝까지 설득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경기침체 위기 고조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권 재등장 등 각종 대내외 리스크가 닥쳐오는 지금이야말로 국정공백과 혼란을 방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내란죄에 해당해 수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학계 의견이 나오는 만큼 더 큰 국가적 오욕을 막기 위해서라도 윤 대통령의 결단이 요구된다. 이 모든 것은 윤 대통령이 자초한 일이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국민의 고통이 커지고 나라의 위기가 증폭된다. 현실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본인의 안위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 바란다.
여야, 국가 위기 극복 위한 정치 복원을
국정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특히 정치권 역할이 막중하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절차와 별개로 여야는 사생결단 식 정쟁을 중단하고 거국내각 구성을 비롯한 국정 공백 해소 방안 모색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안 표결 과정에서 드러난 친윤석열·친한동훈 세력 간 자중지란은 국민 안위보다 계파 이익을 중시하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한 대표와 '친윤' 추경호 원내대표가 의원들과 함께 수습 방안을 논의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나, 당파적 이해가 아니라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당의 사심 없는 대응이 요구된다. 이재명 대표가 이번 사태를 사법 리스크 탈출 기회로 삼으려 한다는 의심을 해소해야 국론 분열을 막을 수 있다. 이 대표는 4일 "(윤 대통령은) 북한과 국지전이라도 벌일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처럼 위기를 부추기는 태도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제1야당 대표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서 합당한지 돌아보기 바란다. 민주당도 의회 폭주에서 벗어나 수권정당의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경제도 풍전등화… 후폭풍 차단에 만전을
가뜩이나 경제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국정 공백과 혼란의 장기화는 위험하다. 계엄령 사태로 어제 증시는 장중 2% 넘게 하락하는 등 종일 요동쳤다. 금융주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등을 돌리며 7% 안팎 급락세로 마감했다. 원·달러 환율 또한 한때 2년 만의 최고치인 1,440원대로 치솟았다. 금융시장 혼란은 시간이 지나며 안정세를 찾아갈 수 있다 쳐도, 대외 신인도 추락은 치명타일 수밖에 없다. 기습적인 계엄 선포 자체가 글로벌 투자자들에게는 한국의 정치·사회적 불안이 크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안 그래도 내수 부진 장기화에 경기 둔화, 세수 부족, 그리고 미국 신정부 출범 등 대내외 악재가 켜켜이 쌓인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경제와 민생은 볼모가 되어선 안 된다. 정부는 이 사태에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경제 후폭풍 차단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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