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를 할 때 좋아하는 가전제품으로 표현해보면 어때요?"
얼마 전 무의가 LG전자와 함께 시작한 장애인 커뮤니티 '볼드무브(Bold Move)' 운영진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단순한 제품 모니터링단이 아니라 전자제품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을 통해 '나다움'을 발견한다는 콘셉트의 커뮤니티다. 언뜻 보면 '전자제품 사용과 나다움이 무슨 관계야?'라고 하겠지만 실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휠체어를 타는 내 딸은 요리와 세탁을 혼자 한 적이 없다. 세탁실에 휠체어로 들어가 빨래를 넣고 꺼내기가 어렵고, 가스레인지 위 음식을 들여다보며 요리하기가 어려워서다. '자취할 수 있을까?' 당사자인 딸뿐 아니라 엄마인 나도 가끔 드는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애인 참가자들은 가전제품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표현했다. "혼자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게 되면 제 인생도 잘 정리될 것 같아요." "혼자 요리하는 게 제겐 너무 중요해서 가스레인지에서 인덕션으로 바꿨어요." "식기세척기를 휠체어로 쉽게 이용할 수 있다면 더 다양한 요리를 해보고 친구도 초대할 용기가 날 것 같아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을 보고 '다리가 아픈가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장애를 '의료적 손상'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장애는 개인의 의료적 손상이 아니라 사회적인 장애, 즉 '사회가 차별하기 때문에 장애가 된다'는 관점이 비등해졌다. 2001년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사회적 장애'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됐다. 즉 휠체어를 타고 자취를 희망하는 청년 집의 세탁실 구조를 바꾸거나 혼자 요리 가능한 조리대가 생기는 건 인권의 영역이자 개인에게는 자기계발이, 건강한 사회를 위한 투자라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정책적으로도 수용되고 있다. 국립재활원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직접 보조기기 개발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보조기기를 제안하고 재활원이 적정기술을 도입해 개발에 나서는 '열린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제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2023~2027)'을 통해 기존 의학적 장애 개념을 사회적 장애로 확대했다. 장애인을 비롯해 다른 신체, 정신적인 상황을 가진 사람을 복지 서비스의 수동적 수혜자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제안자이자 서비스 개발의 주체로 보는 경향이 등장했다. 전자제품 기업이 장애인을 '민원인'이 아닌 고객으로 인지해 장애인이 쓰기 쉬운 제품을 만들고, 전자제품 사용 경험을 통해 자기다움을 만들어가는 장애인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건 이런 거대한 관점 변화를 반영한다.
"정수기에서 한번 휠체어 탄 채 물을 받다가 뜨거운 물에 덴 이후 더운 물을 잘 안 마시게 됐어요. 온수를 매일 아침 마셔보고 건강에 더 신경을 써볼래요." "장애 때문에 그냥 포기하고 살던 게 너무 많았는데 안 쓰던 전자제품을 하나씩 써보고 제안사항을 생각해 보면서 삶의 의욕도 더 생길 것 같아요." 커뮤니티 참가자들이 '내 삶을 바꾸는 다짐'에서 한 말들이다. 어떤 이들에게 물 마시기나 가전제품 써보기는 개인에게 '대담한 변화'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사소해 보이는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제품 개발에 실제로 반영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진짜 사회 혁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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