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할까?"라는 질문이 '잠시 앉아서 시간을 보내자'라는 의미인 우리에게 이탈리아 나폴리의 카페 문화는 한없이 낯설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건 두툼한 나무로 만든 기다란 바. 바 안쪽에는 족히 백 년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구식 에스프레소 머신이 주인처럼 버티고 있는데, 연신 치익치익 소리를 내면서 더운 증기도 뿜어져 나오고, 손을 댔다가는 델 것이 분명한 뜨거운 물도 주욱 쏟아진다. 그러니 묵직한 바 안쪽은 진지한 표정으로 커피를 뽑아내는 바리스타만의 공간. 뛰어난 바리스타는 마치 연예인처럼 대우해 준다는 나폴리 사람들이 '커피의 왕'이라고도 부르는 바리스타 고유의 활동 영역이다. 바 앞쪽은 따로 눌러앉을 테이블은 고사하고 잠시 쉴 의자도 없는 빈 공간인데, 하루 5잔은 너끈히 마신다는 나폴리의 커피 타임이 되면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피자뿐만 아니라 커피의 성지로도 불리는 나폴리는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역사의 출발점이다. 커피 문화를 혁신적으로 바꾼 에스프레소 머신 발명은 1884년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에서였지만, 이미 그 당시에 나폴리에는 원시적이긴 해도 아랍권 문화유산인 증류기를 사용해 커피 원액을 즐기는 에스프레소 문화가 존재했었다. 가난한 도시라 새로 나온 값비싼 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바꾸지 못했던 덕분에 구식 수동 기계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도 하고, 가게 하나에서 하루 1,000잔 이상 팔릴 만큼 광적으로 커피를 좋아하고 맛을 아는 손님 층이 두껍기에 나폴리 에스프레소가 특별하다고도 한다. ‘에스프레소를 담는 잔은 뜨거워야 제맛’이라며 펄펄 끓는 물에 담가 둘 만큼 커피에 진심인 도시이니 모두 일리 있는 말이겠지만, 나폴리 커피 문화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시작된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의 전통이었다.
두 명이 와서 커피 네 잔을 계산하더니 두 잔은 남기고 가고, 또 다른 세 명이 와서 네 잔을 계산하더니 세 잔만 마시고 가는 기묘한 계산법. 가게 주인의 바가지가 아니라 커피값을 내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이 마실 커피를 미리 결제해 놓고 가는 것이다. 이탈리아어로 '맡겨둔'이라는 뜻인 '소스페소' 용도로 계산한 영수증은 가게 입구에 있는 '소스페소' 통에 슬며시 넣고 간다. 커피가 꼭 필요한 누군가는 그 영수증을 꺼내 바리스타에게 건네며 원하는 커피를 받아 마시고, 그렇게 서로 알지 못하는 한 시민의 선물이 영수증을 통해 슬며시 전달된다. 도와준다고 거들먹거릴 필요도 없이, 도움받는다고 비굴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어쩌면 가장 가난한 도시였기에, 가장 가난한 이들의 힘겨움에 눈을 감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추웠던 지난 주말 여의도에서는 이탈리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보는 건 힘들 거라 생각했던 '카페 소스페소'가 불현듯 줄을 이었다. 몇만 원 겨우 용돈을 모았다며 수줍게 전화했다는 소녀도, 나보다는 다른 이에게 주라며 기어코 돈을 내고 갔다는 아저씨도, 선결제 받은 금액보다 간식을 더 얹어주느라 결국 손해를 봤다는 카페 사장님도 참 아름다웠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이 혼란한 시대에 인간의 품격을 보여주는 우아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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