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30대 직장인 여성입니다. 회사 일을 하면서 실수하는 저 자신을 견디기 너무 어렵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직장을 서너 번 바꿨는데 지금 직장은 입사한 지 일 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얼마 전부터 새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면서 많은 혼란이 생겼습니다. 충분한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담당을 맡게 돼 크고 작은 실수가 이어졌어요. 당연한 과정이라며 마음을 다잡으려 할수록 더욱 불안해집니다. 협력사에서는 실수를 용납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일처리를 빨리 하라는 압박이 있어 많이 긴장됩니다. 출근 전날은 잠도 잘 안 오고 새벽에 자주 깹니다. 너무 긴장해서 교육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계속 실수가 반복되니 사람들 앞에 서기가 두렵고 암담한 생각도 점점 커져 갑니다.
예전 직장에서도 실수가 잦아지면서 사람들 대하기가 어려워지고 괴로운 마음이 커져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이전 직장에선 재택 근무를 했는데 다른 사람과 협업해야 하는 업무도 아니고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어 스트레스 없이 잘 회복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나약해지는 자신을 보는 게 너무 괴롭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려운데 이상하게도 누군가 나를 도와줬으면, 불쌍히 여겨줬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청소년기에 부모에게 심리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혼자 해결하려고 했던 시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회피 성향이 있는 분이셨고, 어머니는 계획적이면서 완벽주의적 기질이 있는 분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초등학생이던 때만 해도 사이가 좋았는데 중학생 때 금전 문제가 불거지면서 갈등이 잦아졌어요. 저는 두 분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려고 애썼죠. 대학에 가서 두 분의 갈등을 풀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실망과 무기력이 커졌고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서 직장생활 하는 동안 부모님과 연락이나 왕래를 피했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슬프기도 했지만 해방감도 있었어요. 가족에 대한 부담이 점점 줄어들면서 최근에는 어머니, 외가 식구들과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남들은 제가 따뜻하고 친절하며 타인을 잘 챙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주위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완벽주의적 기질이 강하며 회피 성향도 있습니다. 지인들은 새 프로젝트를 맡은 후에 너무 안 좋아 보인다면서 일을 그만두라고 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참고 견디며 극복해야 할지, 제가 잘할 수 있는 직장을 찾는 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단순히 적성 문제라면 환경을 바꾸는 게 어렵진 않을 것 같지만, 새로운 직장에서도 변함없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을 안 만나고 혼자 하는 일을 찾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여유로운 마음으로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이해빈(가명∙37세∙회사원)
해빈씨가 직장에서 일하며 받는 불안과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디며 극복해야 할지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할지 고민보다 중요한 건 반복되는 어려움의 근원과 관련된 자신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해빈씨는 완벽주의라고 자신을 설명했는데 이런 성향은 회피 성향과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벽주의가 있는 사람은 실패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음으로써 불완전함을 마주할 때의 괴로운 감정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으면서도 의존하지 않으려 하는 성향 배경에 금전 문제로 인한 부모 간의 갈등을 이야기하셨는데요. 금전 관련 욕구가 많아지는 청소년기에 이러한 가정 분위기에서 심리적 갈등을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보통 금전 문제 자체보다는 정서적 소통이 어려운 문제가 이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어머니와 회피적인 아버지는 추격형-회피형이라는 역기능적인 부부관계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경제적 이유로 갑자기 갈등이 생겼다기보다 그전부터 부부간, 자녀와 관계에서 감정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죠.
청소년 시기에는 스스로 결정하고 싶은 것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이를 표현할 수 없거나 거절당하기 쉬운 가정 분위기라면 금전적 요구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수용되지 못하거나 존중받지 못한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구나 감정이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들고 내가 중요하지 않아서 내 요구가 거절당했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물론 부모가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줄 순 없습니다. 다만 거절을 하더라도 마음은 수용해주는 태도가 동반돼야 하는데 해빈씨의 경우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가정 상황이었을 것 같습니다.
청소년기에 자신의 결정이 무시당하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심리적으로 의지를 하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결국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문제는 해결이 안 된 채로 남게 됩니다. 그럴 때 경험하는 감정이 수치심입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단순히 행동 자체에 대한 지적을 넘어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느낌을 받으면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해빈씨가 남을 잘 챙기는 것도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금전적 요구를 거절하더라도 이유를 설명해주고 자녀의 욕구를 이해해주면서 감정에 초점을 맞춘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지 거절당하는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수용의 여부가 자신의 존재감과 연결이 되고, 거절당하면 수치심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마음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나 인정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평가가 기준이 되는 완벽주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목표 달성을 위한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하기에 완벽주의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순 없습니다. 완벽주의에는 실패나 실수를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적응적 완벽주의와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자책하는 부적응적 완벽주의가 있는데 해빈씨는 후자에 가까운 듯합니다.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목표를 너무 높게 설정하고 도달하지 못할 경우 스스로를 비난하고 남들도 나를 비난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수치심을 느끼죠.
해빈씨에겐 부모에게 통제받으며 자율성을 인정받지 못한 경험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해방감을 느꼈다고 썼는데 해방감이란 통제에서 벗어날 때의 느낌이거든요. 금전적인 요구를 아버지가 거절했을 때 통제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자율성과 존재를 존중받고 싶은데 그게 충족되지 않으니 실망하게 되고 무기력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잘 지낸다고 썼지만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정은 해결이 안 된 상태 그대로여서 직장에서도 그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그만두는 방식으로 회피하게 됐을 것 같고요.
해결책으로는 우선 자신의 부적응적 완벽주의가 어떻게 발생한 건지 잘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성인이니 부모와의 관계가 아닌 스스로 자신을 수용해주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직장에서 실수를 하면 그 상황 자체에 몰입해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며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마련인데, 그 대신 잠시 멈춰서 자기 마음을 먼저 돌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비난하고 자책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 자기 편이 돼 보세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식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거죠. 그게 잘 안 된다면, 자신을 타인이라 생각하고 어떤 이야기를 해줄지 생각해보세요. 해빈씨가 타인을 배려하고 챙기듯 스스로를 대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수치심이 몰려온다면 문제 해결에 몰두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피하는 데 집중하려 할 겁니다. 그럴 때 감정을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합니다. 수치심이나 좌절 같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외면하지 말고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감정을 언어화해 보세요. 그리곤 그런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겁니다. 괴로운 감정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마주해야만 해소가 될 것이라고 마음먹으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혼자 하는 것이 어렵다면 일대일 상담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부모에게 의지할 수 없어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의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더 의지하고픈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통해 수용받고 지지받는 경험,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존 욕구를 해결할 수 있어야 부적응적 완벽주의도 해결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완벽주의를 권하는 분위기도 해빈씨의 고통을 조금은 심화시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중요한 건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주도권을 갖는 것입니다. 해빈씨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주도적인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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