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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초록부터 짙은 쪽빛까지… 희망의 색 '블루'

입력
2025.01.08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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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불에서 장사해수욕장까지 영덕블루로드

영덕블루로드의 바다색은 세상의 모든 푸른색을 버무린 듯 찬란하다. 삼사해상산책로 바다가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영롱하다.

영덕블루로드의 바다색은 세상의 모든 푸른색을 버무린 듯 찬란하다. 삼사해상산책로 바다가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영롱하다.

어둠보다 짙은 ‘블루(Blue)’. 서양에선 오랫동안 푸른색을 외로움, 고독함, 쓸쓸함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된 미국 흑인들의 구슬픈 처지는 ‘블루스’ 음악을 탄생시켰고, 돌림병이 창궐하거나 사회적 참사가 발생할 때면 지금도 ‘○○블루’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푸른색은 찬란하고 눈부시다. 경북 영덕은 바다와 나란한 도로와 걷기길에 ‘블루로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투명한 초록부터 짙은 쪽빛까지 세상의 모든 푸른색을 담은 길이다. 깊은 슬픔에서 끌어올린 희망의 빛깔이 일렁거린다. 북쪽 고래불해수욕장에서 남쪽 장사해수욕장까지 영덕블루로드 주요 명소를 훑었다.

고래의 꿈 일렁거리는 바다에 해녀가 자맥질

영덕블루로드는 남쪽 남정면 대게누리공원에서 병곡면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쪽빛 파도의 길’ ‘빛과 바람의 길’ ‘푸른 대게의 길’ ‘목은 사색의 길’ 4개 구간으로 나뉜다. 빠른 길 위주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면 바다와 멀어진다. 블루로드는 바닷가 갯마을을 연결한다.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면 마을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까지 새록새록 살아난다.

고래불해수욕장은 영덕에서 가장 큰 해변이다. 병곡면 6개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약 8㎞에 걸쳐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푸른 솔밭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으니 넓고 수려하다. 해변 북측에 커다란 고래 모양 전망대가 등대처럼 서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정면으로 바다에서 불쑥 솟은 듯 상대산이 보이는데, 완만하게 휘어진 해변이 그곳까지 이어진다.

고래불해수욕장에 고래 모양의 커다란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맞은편 상대산 아래까지 모래사장이 펼쳐지는 영덕에서 가장 넓은 해변이다.

고래불해수욕장에 고래 모양의 커다란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맞은편 상대산 아래까지 모래사장이 펼쳐지는 영덕에서 가장 넓은 해변이다.


상대산 꼭대기 관어대에서 내려다본 고래불해수욕장. 짙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래를 상상한다.

상대산 꼭대기 관어대에서 내려다본 고래불해수욕장. 짙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래를 상상한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고래불해수욕장은 수면 위로 하얀 분수를 뿜으며 노니는 고래에서 비롯했다. 상대산 꼭대기에 관어대라는 누각이 있다.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이 관어대부(觀魚臺賦)에서 “동해 석벽 밑에 임하여 노는 물고기를 셀 만하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작명 연유를 밝히고 있다. 실제 고래를 보지 못했을지라도 드넓은 바다를 거침없이 헤엄치는 커다란 고래를 상상했으리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상대산 아래 바닷가에는 관어대와 쌍벽을 이루었던 봉송정 누각을 복원해 놓았고, 바로 앞은 야영장이다.

고래불에서 조금 내려오면 대진항이다. 큰 나루라는 명칭과 달리 아담한 어촌이다. 포구 북측에 의병장 김도현(1852~1914)을 기리는 도해단(蹈海壇)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후 1907년 안동의 이만도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만도는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24일간 단식하다 순국했고, 김도현은 1914년 관어대에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바다에 투신했다.

대진항에 고래 형상의 해상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주변 물빛이 보석처럼 찬란하다.

대진항에 고래 형상의 해상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주변 물빛이 보석처럼 찬란하다.


대진항 시린 바다에서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다. 움츠리고 나태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이다.

대진항 시린 바다에서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다. 움츠리고 나태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이다.


대진항 시린 바다에서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다. 움츠리고 나태한 마음이 죽비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장면이다.

대진항 시린 바다에서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다. 움츠리고 나태한 마음이 죽비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장면이다.

포구 앞에 고래 형상의 해상산책로가 설치돼 있다. 물이 맑아 바닷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에메랄드 물빛에 햇살이 부서지고 검푸른 수초가 일렁거린다. 보기만해도 시린 겨울 바다에 노령의 해녀들이 거침없이 뛰어든다. ‘휴우~~, 어어히~~.' 고래 노닐던 바다에 울려 퍼지는 숨소리가 숭고하고 아름답다. 120년 전 절망의 바다에서 강인한 삶의 의지로 희망을 건져 올린다. 춥다고 움츠렸던 마음이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대진항에서 구불구불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축산항에 닿는다. 강구항과 함께 영덕에서 가장 큰 항구다. 바닷가에 봉긋하게 솟은 죽도산 꼭대기의 전망대에 오르면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포구를 감싼 마을 지붕이 모두 바다색이다.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축산천)을 도보 현수교가 가로지른다. 이름하여 ‘블루로드다리’다. 다리를 가운데 둔 바다와 하천이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짙푸르다.

죽도산 아래 파란 지붕 집들이 모여 있는 축산항 풍경. 뒤편에는 블루로드다리가 놓여 있다.

죽도산 아래 파란 지붕 집들이 모여 있는 축산항 풍경. 뒤편에는 블루로드다리가 놓여 있다.


축산항 블루로드다리 안팎의 강과 바다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푸른 빛깔이다.

축산항 블루로드다리 안팎의 강과 바다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푸른 빛깔이다.


BTS와 대게원조마을, 그리고 창포말등대

축산항 아래 바닷가 언덕에 계단식으로 자리 잡은 차유마을이 있다. 대게를 놓고 울진과 원조 경쟁을 벌이는 영덕은 이곳을 ‘대게원조마을’로 콕 집었다. '차유'라는 지명은 옛날 영해부사가 소달구지(牛車)를 타고 뒷산을 넘어(踰) 순시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바다는 경작지가 거의 없는 마을의 주된 생활 터전이다. 대게는 동해안 냉수대 수심 200~800m, 모랫바닥이나 진흙이 섞인 곳에 주로 서식한다. 영덕군은 그중에서도 차유 앞바다에서 잡은 대게가 다리가 길고 살이 꽉 차 맛이 담백하다고 자랑한다. 대형 선박을 활용한 먼바다 어업이 성행하며 지금은 그 지위를 강구항에 내주고 말았지만, 대게가 특별한 먹거리로 부각되던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인근에서 전통 방식으로 대게잡이를 해 온 건 차유마을뿐이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포구 옆에 이런 내용을 담은 ‘대게원조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차유마을 포구 부근에 '대게원조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차유마을 포구 부근에 '대게원조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차유마을과 경정마을 사이 해안도로는 바다와 바짝 붙어 있다.

차유마을과 경정마을 사이 해안도로는 바다와 바짝 붙어 있다.


차유마을 앞 갯바위에서 낚시꾼이 고기를 잡고 있다.

차유마을 앞 갯바위에서 낚시꾼이 고기를 잡고 있다.

차유마을에서 모퉁이를 돌면 경정항이다. 두 마을 모두 관광지로 존재감이 미미한데, 몇 해 전 BTS가 화양연화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으로 알려지며 팬들이 심심찮게 찾아오고 있다. 두 마을 사이 해안도로는 블루로드에서도 바다와 가장 가까이 붙어 있어 평범하면서도 옛 갯마을 서정이 녹아 있다.

석동, 노물, 오보, 대탄 등 있는 듯 없는 듯 작은 포구를 따라 강구 부근까지 내려오면 창포말등대와 해맞이공원에 닿는다. 1997년 창포리 일대는 대형 산불로 해안과 주변 산이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영덕군은 피해 복구 사업으로 해맞이공원을 조성했고, 기존 창포말등대도 새로 단장했다. 이를테면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발하는 등대다. 해안 절벽에 대게 집게발이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세운 창포말등대는 이제 블루로드의 상징이자 해돋이 명소가 됐다. 등대에서 탐방로를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면 갯바위에 푸른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이곳에서 북측 오보해수욕장까지 해안을 따라 블루로드 걷기길이 개설돼 있다.

창포말등대 뒤로 짙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주변 해맞이공원과 함께 영덕의 일출 명소다.

창포말등대 뒤로 짙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주변 해맞이공원과 함께 영덕의 일출 명소다.


영덕 일출 명소인 창포말등대 너머 수평선에서 말갛게 해가 떠오르고 있다.

영덕 일출 명소인 창포말등대 너머 수평선에서 말갛게 해가 떠오르고 있다.


창포말등대 아래 해맞이공원에 블루로드 포토존이 세워져 있다.

창포말등대 아래 해맞이공원에 블루로드 포토존이 세워져 있다.


창포말등대 아래에서 위쪽 오포마을까지 해안 절벽을 따라 블루로드 탐방로가 연결된다.

창포말등대 아래에서 위쪽 오포마을까지 해안 절벽을 따라 블루로드 탐방로가 연결된다.

해맞이공원 뒤편 산등성이에는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돼 있다. 신재생에너지전시관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탐방로가 조성돼 있는데, 대형 바람개비 너머로 검푸른 동해 바다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세찬 겨울 바람을 맞기에 딱 좋은 곳이다.

공원 초입에 윤선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전남 강진과 해남이 윤선도 유배지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후 조정의 관직 제수를 거절하고, 보길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와서도 임금께 바로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1638년 6월 영덕으로 유배됐다. “어찌 알았으랴 / 이 밤 동해 바닷가에서 / 맑은 달빛 마주한 채 / 옛 동산 그리워할 줄.” 시비에 1년 남짓 머물렀던 영덕에서의 심경을 담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영덕풍력발전단지에 윤선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영덕풍력발전단지에 윤선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영덕풍력발전단지 탐방로의 물고기 조형물 아래로 짙은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영덕풍력발전단지 탐방로의 물고기 조형물 아래로 짙은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영덕풍력발전단지 바람개비 뒤로 짙은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영덕풍력발전단지 바람개비 뒤로 짙은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강구항 대게와 장사해변 학도병

강구항은 영덕의 대표 항구이자 대게 집산지다. 오십천 강어귀에서 시작되는 포구 위 상가가 모두 대게식당이자 판매장이다. 찜통마다 하얀 김을 풀풀 토해내고 구수한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다.

포구 북측에 해파랑공원이 있다. 방파제 안쪽에 대게를 비롯한 여러 조형물을 설치하고 산책로를 조성했다. 강구항에서 가장 편안하게 바다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강구항에서 오십천 건너 언덕에는 삼사해상공원이 있다. 1995년 망향탑을 설치하고, 1998년 신라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을 본뜬 경북대종을 세워 웅장한 모양새를 갖췄지만 옛날 관광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해돋이 명소라는 자랑과 달리 지금은 나무에 가리고 바로 앞에 큰 건물이 들어서서 바다 조망도 썩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강구항 해파랑공원의 대게 조형물.

강구항 해파랑공원의 대게 조형물.


삼사해상산책로 바다는 세상의 모든 푸른색을 버무린 듯 찬란하다.

삼사해상산책로 바다는 세상의 모든 푸른색을 버무린 듯 찬란하다.


삼사해상산책로 바다는 세상의 모든 푸른색을 버무린 듯 찬란하다.

삼사해상산책로 바다는 세상의 모든 푸른색을 버무린 듯 찬란하다.


대신 마을 앞 바닷가로 나가면 영덕블루로드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부채꼴 모양의 해상산책로 아래로 옅은 초록에서 짙은 남색까지 세상의 모든 쪽빛이 펼쳐진다. 고운 모래와 갯바위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 물위의 갈매기와 물속의 수초까지 어우러진 바다색이 눈이 시릴 정도로 환상적이다.

남쪽 끝자락 장사해수욕장은 영덕에서 고래불 다음으로 넓은 해변이다. 해변 남쪽에 커다란 군함이 정박해 있는데, 실은 2,700톤급 상륙함 문산호를 재현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4일부터 19일까지 영덕 장사리에서 벌어진 전투다.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9월 15일, 학도병 772명으로 구성된 독립유격대를 태운 문산호가 이곳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을 시도했다. 배는 심한 파도에 휩쓸려 좌초됐지만 유격대는 북한군의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10여 시간의 사투 끝에 결국 상륙에 성공했다. 이 작전으로 국군은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후방을 교란해 큰 타격을 입혔지만 유격대원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다. 북한군 사망자는 27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의 참혹한 상황과 관계없이 문산호 옆 갯바위에는 여전히 맑고 푸른 파도가 들이치고 있다. 전시관은 올 6월까지 시설 개선을 위해 휴관 중이다.

장사해수욕장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전시 시설 교체로 6월까지 휴관 중이다.

장사해수욕장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전시 시설 교체로 6월까지 휴관 중이다.


영덕블루로드 주요 명소. 그래픽=강준구 기자

영덕블루로드 주요 명소. 그래픽=강준구 기자

장시간 운전으로 주저되던 영덕 여행에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포항과 삼척을 잇는 동해선 철도가 완공돼 새해부터 강릉역과 부산 부전역을 잇는 열차가 운행 중이다. 영덕군에는 고래불, 영해, 영덕, 강구, 장사 5개 역이 있다.



영덕=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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