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구 순천대 명예교수, '이형경전' 첫 현대어역

이상구 순천대 명예교수가 지난 1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자신이 직접 현대어로 옮겨 대중에게 처음 선보이는 국내 최초의 여성영웅소설 '이형경전'을 들고 웃고 있다. 정다빈 기자
"내가 비록 여자이나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으리라. 세속 여자들이 지아비를 두려워하여 귀중하게 여기고, 시부모를 공경하여 밥상을 받들고 국을 맛보는 등 시중을 드는 일과 수시로 술을 빚어 손님 대접하기를 불평하며, 문을 닫고 담에 둘러싸인 깊은 규방에서 바느질이나 하는 것은 내가 차마 못할 일이니라."
18세기 초반 한 여성의 '비혼 선언'이라 할 수 있겠다. 여인은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여필종부가 공고했던 시대, 결혼 대신 벼슬을 해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겠다던 이 여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영웅소설 '이형경전'의 주인공 이형경이다. 고소설은 물론 근대소설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사회적 자아실현을 위해 나아갔던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 '이형경전'의 진가를 알아본 고전문학 연구가 이상구(67) 순천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일보와 만나 "우리 소설사를 넘어서 사회·문학사적으로도 진지하게 다뤄야 할 대단한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뒤늦게 현대어역된 현존 최고 여성영웅소설
이 교수는 '이형경전'을 현대어로 옮겨 처음 대중 앞에 선보였다. 총 7종의 이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필사본을 현대어역한 '이형경전'이 최근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5번째 책으로 나왔다. 1925년 회동서관에서 간행된 구활자본을 현대어역한 '이학사전, 대원수가 된 여자 이현경'으로도 지난달 출간됐다.

이상구 순천대 명예교수가 가장 오래된 필사본을 현대어역한 문학동네 고전문학전집 '이형경전'과 1925년 구활자본을 현대어로 옮긴 지만지한국문학의 '이학사전, 대원수가 된 여자 이현경'.
'이학사전', '이현경전'으로도 전해 내려온 이 작품의 가치는 뒤늦게 발견됐다. 학계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시대를 앞서간 진보적 색채 때문에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 쓰인 작품으로 여겨져 온 탓이다. '이형경전'이 현존 최고(最古) 여성영웅소설로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은 18세기 초 고소설 '투색지연의'에서 이형경의 이름 석 자가 나오면서다. 그렇다면 '이형경전'의 집필 시기는 늦춰 잡아도 18세기 초, 이르면 17세기 말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성 최초로 한국고전여성문학회장을 지낸 이 교수는 '이형경전'의 필사본을 수소문한 끝에 얻어 2023년부터 1년간 직접 현대어로 옮겼다. "고소설 가운데서도 오늘날의 지향을 선취하고 있는 정말 좋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지난달 정년 퇴임한 그는 "이게 내 마지막 작업"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지난달 정년퇴임한 이상구 순천대 명예교수는 "고소설 얘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한다"고 했다. 남동균 인턴기자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영웅의 첫 등장
'이형경전'은 다른 여성영웅소설과 비교해도 빼어난 작품이다. 부모 반대에도 글 공부에 전념하던 이형경은 8세 무렵부터 남장을 하고, 10세 때 아들로서 부모상을 치르고는 아예 남자로 살기로 한다. '홍계월전', '정수정전', '방한림전' 등 여성영웅소설 속 남장을 한 여성은 대부분 부모 뜻에 따라 가문을 빛내거나 원수를 갚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한다. 반면 "이형경은 오로지 사회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온몸을 던졌다는 점에서 이들과 구별된다"고 이 교수는 짚었다.
당대가 요구하는 전통적 성역할 또한 단호히 거부한다. 이형경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 홀로 살다 사후 묘비에는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딸'이 아닌 '대명 문연각 태학사 겸 청주후 이형경의 묘'로 쓰이기를 원한다. 다른 여성영웅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또 있다. 이형경은 '남성 못지않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는 죽마고우 장연의 권유로 과거를 봐 장원급제하고, 장연은 둘째 장원에 오른다. 이형경은 남성문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최고의 문장가이자 중국 진나라의 명장 항우에 비견되는 무술 실력까지 갖춘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남주인공 장연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이 교수는 "장연은 형경이 모든 점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인물임을 기꺼이 인정하고 칭송한다"며 "앓아 누울 정도로 형경을 열렬히 사랑하는 인물형으로도 여성영웅소설에서는 드물다"고 했다.

이상구 순천대 명예교수가 '이형경전'의 한 부분을 손으로 짚고 있다. 정다빈 기자
다만 이형경은 왕의 꾀로 인해 뜻을 굽혀 장연과 결혼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당대 독자들 시각에서는 형경이 비혼을 고수하는 게 도리어 황당한 이야기로 읽혀 수용되지 못했을 것"이라며 "형경이 시대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남성보다 뛰어난 능력을 펼쳤다는 게 결국 이 소설의 끝에 남는 이야기"라고 했다. 좀 더 자유롭기 위해 중세적 이념과 제도에 시비를 거는 '가녀린 몸부림'을 시대적 한계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