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문학상을 탄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책을 읽다 만 적이 있다. 별 재미도 특별한 인상도 못 받았기 때문일 테다. 그의 문학을 이야기할 때마다 따라 붙는 ‘기억을 통한 인간(성)의 탐구’라는 수사도 나로선 싱거웠다. 안 그런 문학도 있나, 하는 얕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상의 권위에 이끌려 며칠 전 다시 그의 작품을 꺼내 읽다가 뜬금없게도, 거기서 기억 너머의 그리움을 엿보게 됐고, 그리움이란 게 사뭇 다른 두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는 어줍잖은 생각을 하게도 됐다. 지금은 없는, 한 때 내 것이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하나이고, 한 순간도 내 것인 적 없었던, 그래서 뭔진 몰라도 어딘가 있을 막연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다른 하나라는 생각이다. 전자가 결핍과 상실의 아픔으로 가슴 저미는 그리움이라면, 후자는 동경이나 기대, 기약 없는 희망 같은 감정과 더불어 부푸는 그리움이다. 전자는 기억에 이끌리는 감정이고, 후자는 상상력에 연루된 감정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문화 예술의 토양이 기억과 상상력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듯도 하다.
저 두 종류의 그리움이 만나 하나로 포개지는 거대한 순간을 파트리시오 구스만 감독의 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 ‘빛을 향한 그리움(Nostalgia for the Light)’에서 사무치게 경험한 적이 있다.
세계 최대 천체망원경이 있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산정. 천문대의 과학자들은 맑고 차고 마른 밤 하늘의 별들이 쏟아내는 방사신호를 포착해 전파로 변환하고, 그 신호들의 스펙트럼을 분석해 별의 진실을 탐문한다. 별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생겨있고, 또 생겨갈 것인지 살피는 일. 별 속 칼슘의 비밀에서 뼛속 칼슘의 사연, 태곳적 생명의 기원을 밝혀줄 단서를 쫓기도 한다.
한편 천문대 아래 거친 자갈 사막 위에는 ‘칼라마(Calama)의 여인들’이 있다.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가 1973~89년의 17년 동안 납치 고문 살해 암매장한 반정부 인사들, ‘내’남편과 자식과 형제의 유해를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다. 사막 도시 칼라마의 여인들은, 천문대의 과학자들이 1,000억 개의 별들 속에서 비밀을 찾듯이, 박절한 바람에 풍화하고 남은 뼛조각이라도 찾겠다며 20년 넘게 그 광막한 땅을 파헤치고 있다.
하늘 너머 더 너머 빛 속 어딘가에 있을 해답의 단서를 찾는 과학자들의 그리움이 까마득한 과거를 향한 미지의 상상력 위의 그리움이라면, 여인들이 파헤치는 것은 엎어지면 코 닿을 자리의 진실에 대한 기억 위의 그리움이다. 영화는 두 그리움이 우주의 시간과 아타카마의 공간 위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사막의 바람처럼 건조하게 보여준다.
다른 점도 있다. 과학자들은 월급 받아가며 매일 편히 잠들고, 여인들은 결코 편히 잠들지 못한다. 세상은 과학자의 활동은 기꺼워하지만 여인들에게는 “다 지난 일이잖아. 그만해”라고 말한다. ‘지난 일’로 치자면 원시 세균이 진핵세포로 다세포로, 마침내 인간으로 진화한 것도 한참 지난 일이다.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세대다. 저 국민교육헌장이 부여한 거룩한 사명까진 모르겠으나, 헌장이 지시하고 국가가 암기하게 한 ‘우리의 나아갈 바’란 게 저 기억과 상상력의 장애물이란 건 안다. 내용은 두더라도 형식이 그렇다는 의미다. ‘이제 그만하라’며 막는 것도, ‘이게 전부’라며 시선을 제약하는 것도, 저 길의 장애물이다. 여러 종의 교과서 가운데 끼어 든 미심쩍은 한두 종의 교과서보다 단일의 국정교과서가 그래서 더 나쁘다. 그건 이념과 사상, 한 시대 역사의식의 문제 이전에 인간과 반인간, 문화와 반문화의 문제다.
영화 속 두 그리움이 좇는 ‘빛’은 과학의 진실처럼 영원한 가설일지 모르고, 의혹 위에 놓일 새로운 의혹일수도 있다. 또 모디아노도 누구도 우리에게 궁극의 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상을 주고 받는 까닭은 ‘빛’못지 않게 ‘그리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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