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조현병학회ㆍ한국일보 공동 기획] ‘조현병 바로 알기’ ⑩이정석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제 다 나았어요. 약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역시 의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10년째 조현병을 앓고 있는 38세의 장씨가 외래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 장씨는 외래에 다니며 약을 잘 복용할 때에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노부모를 잘 부양하며 안정적으로 지냈다. 그러나 약을 먹으면 멍하고 졸리다는 이유로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아 병이 재발해 자신을 욕하는 환청에 괴로워하다가 반복적인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조현병 재발을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한 약물 치료다. 정해진 용법에 맞춰서 빼먹지 않고 약을 먹어야 증상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약을 잘 복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다 보니, 약 복용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다.
치료 의지가 부족하니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는 것을 귀찮아 한다. 게다가 약을 복용하면 여러 불편을 주는 부작용을 느낄 때가 많아 복용 의지가 더욱 약해진다. 또한 ‘조현병은 심각하고 무서운 질환’이라는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환자들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약 먹는 것을 들킬까 두려워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약을 조금씩 거르다가, 결국 완전히 끊어버리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국내 조현병 환자들의 치료 지속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2006~2007년에 조현병을 처음 진단 받은 환자 가운데 2008년 한 해 동안 꾸준히 약 처방을 받은 비율은 2%도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자료에도 2017년 조현병으로 진료를 받은 실제 인원이 10만7,000명 정도였다. 이는 조현병 유병률을 최소로 낮춰 잡아 0.5%로 가정했을 때 추정 환자수 25만명과 비교해도 턱없이 낮은 숫자이다. 국내에서는 조현병 진단을 받은 초기에 꾸준히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가 매우 적어 그들 대부분이 결국 만성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앞에서 말한 장씨는 5번째 입원 만에 싫어하는 약을 먹는 것 대신에 장기 지속형 주사제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주사요? 안 맞아요. 그냥 싫어요.” 장씨의 첫 반응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럼 한 번만 맞아볼까요”라는 반응이 나오기까지 의사와 부모의 계속된 설득이 필요했다. 장씨는 퇴원 후 한 달에 한 번 주사를 맞기 위해 외래에 내원하고 있으며, 1년 이상 재발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 외래 방문 때마다 밝은 모습으로 “약을 먹지 않고도 잘 지내서 좋아요”라고 말한다.
장기 지속형 주사제는 조현병 환자들이 꾸준히 약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됐다. 한 달 혹은 석 달에 한 번 주사만 맞으면 된다. 이렇게 하면 하루에 몇 번씩 꼬박꼬박 약을 먹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약 먹는 모습을 들킬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주사제를 맞는 환자들은 약을 먹는 환자들보다 증상 악화로 인한 다시 입원하는 사례가 적고 삶의 만족도도 더 높다. 이런 장점 때문에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대부분에서 30%가 넘는 환자들이 먹는 약 대신 주사제를 처방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주사제를 처방 받는 환자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최근 들어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 5~8%에 불과하다. 환자들이 주사제 사용을 꺼리는 이유는 정보 부족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무슨 주사예요? 그거 아플 것 같아서 싫어요.” “아니 한 달에 한 번 주사를 맞아요? 한 달 치를 한 번에 몰아서 맞는 거면 얼마나 센 주사인 거예요?” 임상현장에서 환자들에게 주사제 사용을 권유할 때 흔히 듣게 되는 반응이다. 아직은 이러한 치료가 대중화돼 있지 않다 보니 생소함에 따른 거부감이 앞선다.
근육주사를 통해 몸 안에 들어간 약물은 아주 서서히 작용해 일정한 혈중 농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먹는 약보다 오히려 부작용이 적다. 아무리 좋아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으니 거부감부터 들게 되는 것이 문제다.
현재 비용이나 진료 형태와 관련해 정책적으로도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다. 건강보험 환자들의 경우 먹는 약은 약값의 30%만 부담하면 되지만 주사제는 의료기관 종별에 따라 30~60%를 본인이 부담해야 하므로 치료비가 약간 늘어난다. 조현병은 산정 특례 질환이므로 이 특례를 신청하면 진료비를 크게 낮출 수 있어 주사제를 사용해도 비용 부담이 아주 적을 수 있다.
그럼에도 행여나 조현병이 알려질까 두려워 특례 신청을 꺼려하는 환자들이 많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의료급여 환자는 외래에서 먹는 약을 처방 받으면 월 2,000원 정도, 주사제를 처방 받으면 월 2만원 정도 부담해야 한다. 당장 생계가 곤란한 환자에게 이 정도의 차이도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많은 OECD 회원국에서 의료진이 환자 집으로 찾아가 주사제를 놓는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제도가 없다.
최근 들어 조현병 환자와 관련해 안타까운 사건들이 여러 번 터지면서 조현병 치료가 국가와 사회 책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제 의사와 환자, 가족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조현병 환자가 꾸준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장기 지속형 주사제가 이 역할을 일정 부분 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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