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0시 필리핀 칼리보공항 출발
한국행 에어아시아 Z2036편
날개 쪽 탑승 한국인 “기름 냄새”
2시간 정비 끝에 재출발 시도
이륙 직전 또 “기름 쏟아져” 지적
승객들 새벽 내내 탑승동 대기
“이륙했으면 137명 모두 죽을 뻔”
지난 해 연말 필리핀 보라카이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낸 박모(39)씨는 지난 1일 0시 10분(현지시간) 칼리보국제공항을 떠나는 인천국제공항행 에어아시아 Z2036편을 이용했다가 아찔한 일을 겪었다. 항공기가 출발 예정 시간을 50분 가량 넘겨 계류장을 벗어나 활주로로 이동할 때만 해도 저비용항공사(LCC)의 흔히 있는 출발 지연 정도로 생각했다.
고단함을 풀기 위해 잠을 청하려던 박씨는 순간 귀를 의심할 말을 들었다. 항공기 날개 쪽에 타고 있던 한 승객이 “엔진에서 기름이 샌다”면서 날개 아래 쪽을 손으로 가리킨 것이다.
박씨는 “연료가 샌 것인지, 엔진오일이 샌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행기에 탈 때부터 기름냄새가 많이 났다”며 “승객들이 누유 사실을 알리자 승무원들이 무전으로 기장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얘기를 주고 받더니 비행기를 돌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엔진 누유로 인해 이륙하지 못한 채 탑승 게이트로 돌아 가는 이른바 ‘램프 리턴(Ramp return)’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해당 항공기는 승객들을 모두 내려둔 채 2시간 넘는 정비 끝에 이날 오전 3시30분쯤 재출발을 시도했다. 하지만 한 승객이 항공기가 활주로에서 이륙하기 직전 다시 기름이 새는 것을 발견, 승무원들에게 누유 사실을 알렸고 항공기는 두번째 램프 리턴을 했다.
당시 기름이 새는 것을 목격한 한 승객은 “(두번째 누유 때는) 기름이 쏟아져 나왔다”라며 “그대로 이륙을 했으면 137명이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승객들은 탑승동으로 되돌아와 항공사 측에서 강하게 항의했으나 되돌아온 것은 대체 항공편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뿐이었다. 승객들은 가벼운 옷차림과 강한 에어컨 바람에 추위에 떨었고 다른 항공기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좌석을 차지해 바닥에 앉아 무작정 기다렸다. 승객들의 항의가 계속되자 항공사 측은 이날 오전 4시 45분쯤 호텔을 제공하고 오전 7시쯤에는 도시락도 나눠줬다. 그러나 승객들의 화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박씨는 “승객들은 ‘우리가 다 죽을 수 있었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항공사 측은 100여명을 일렬로 줄 세우더니 빵하고 물을 나눠 주는 게 고작이었다”며 “오전 5시가 다돼 위치도 모르는 호텔을 안내해주면서 오전 7시까지 오라고 하는데 누가 이용하겠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결국 승객들은 이날 오전 9시 30분쯤 마닐라공항에서 날아온 대체 항공편을 타고 오전 10시 25분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당초 예정됐던 출발 시간보다 10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오전 5시 25분(한국시간) 인천공항에 도착해 새해 첫날을 맞을 예정이었던 승객들은 이날 오후 3시 30분이 돼서야 한국땅을 밟았다.
승객들은 귀국 후에 항공사 측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항공사 측은 승객들이 개별 구매한 항공권 가격과 동일한 액수의 유효기간 3개월짜리 항공 마일리지(크레디트쉘)를 제공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일부 승객들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는데 (같은 항공사를) 또 이용하라는 것이냐”라며 반발하고 있다.
에어아시아 관계자는 “파일럿(기장)과 테크니션(정비기술자)이 누유 사실을 확인해 2차례 램프 리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필리핀 현지에서 작성한) 리포트(보고서)에는 승객들이 누유 사실을 알렸다는 내용이 없었으며, 정확한 것은 본사를 통해 확인해봐야 하지만 (누유는) 조종석에서 파악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말했다.
이환직 기자 slamh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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