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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회식… 텅 빈 백화점… ‘동남권 조선벨트’ 동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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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회식… 텅 빈 백화점… ‘동남권 조선벨트’ 동반 추락

입력
2016.04.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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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체불 급증… 지갑 안 열어

월급날 돼도 시내 거리 썰렁

“금은방 매출 예전보다 80% 뚝”

울산 현대重 감원설에 어수선

협력업체들 돈줄 끊겨 아우성

원자재 공급 포항도 생산 급감

경남 거제시가 조선경기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24일 이 지역 번화가인 고현동 일대가 휴일인데도 인적이 드물어 썰렁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경남 거제시가 조선경기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24일 이 지역 번화가인 고현동 일대가 휴일인데도 인적이 드물어 썰렁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휴일인 24일 경남 거제시 장평동의 한 백화점 매장이 손님이 없어 한산하다. 입점 업체 직원들은 “조선업계 침체로 임금이 밀리는 곳이 많아 고객들이 지갑을 닫았다”며 울상을 지었다. 거제=전혜원기자 iamjhw@hankookilbo.com
휴일인 24일 경남 거제시 장평동의 한 백화점 매장이 손님이 없어 한산하다. 입점 업체 직원들은 “조선업계 침체로 임금이 밀리는 곳이 많아 고객들이 지갑을 닫았다”며 울상을 지었다. 거제=전혜원기자 iamjhw@hankookilbo.com

“일본이나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 저처럼 미혼인 젊은 조선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20대 중반에 조선업계에 뛰어들어 올해 8년차 조선소 협력업체 직원으로 일하는 장모(31)씨의 넋두리다. 장씨는 호황이던 2009년부터 거제 대우조선해양, 울산 현대중공업을 거쳐 현재의 삼성중공업까지 ‘조선업계 빅3’ 현장을 모두 누볐지만 갈수록 악화하는 업계 환경을 고스란히 체감하고 있다.

그는 “내가 맡은 해양플랜트 일감은 내년 초면 끝이 난다”며 “선배들 중에는 귀농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는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이 임박하면서 경남 거제 통영 고성에서 울산, 포항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동남권 벨트’의 지역 경제도 동반 추락하고 있다. 특히 조선소가 지역경제를 견인하던 시대가 저물면서 조선업 시설이 밀집된 경남 거제시와 통영시, 고성군의 체감경기는 급전직하했다. 올 6월까지 신규 수주 물량이 없으면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두 곳에서만 2만5,000여명의 실직자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조선업 호황에 힘입어 한때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 운운하던 것은 옛날 이야기가 됐고, 특히 소득에 민감한 귀금속, 자동차, 외식업 등 ‘사치재’ 소비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거제에는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조선소가, 통영에는 성동조선해양, SPP조선, 가야중공업이 있다. 고성에는 STX조선의 자회사인 고성조선해양과 삼호조선해양 등이 있다. 이들은 거리가 가까워 거대한 단일 조선소 타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일 오후 7시 거제시내의 유일한 백화점을 찾았다. 중저가 가방을 판매하는 이모(45ㆍ여)씨는 “고객들이 지갑을 닫아버렸다”며 “협력업체 월급날이 매달 20일 전인데 월급을 탄 후 돈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귀금속을 판매하는 A(36ㆍ여)씨는 “지난해 4월과 비교해 매출이 30% 가량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지갑을 닫은 이유중 하나는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임금체불 때문이다. 24일 고용노동부 통영지청에 따르면 지난달까지 거제, 통영, 고성의 임금체불액은 약 90억원으로 전년도 동기 체불액 29억원의 3배에 달했다.

거제에서 차량으로 1시간 거리인 통영시 광도면 죽림리 해안도로는 평소 술집과 유흥주점이 밀집해 조선업계 직원의 ‘불금’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이날은 유흥분위기를 찾기 어려웠다. 4년째 죽림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송원호(50)씨는 “통영 조선소 3곳이 가동을 멈춘 탓도 있지만 최근엔 인근 거제 손님들조차 아예 오지 않는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인근 고성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30년 가량 금은방을 운영했다는 노전호(59)씨는 “작년 매출의 절반이다. 호황이던 시절과 비교하면 최대 80%까지 감소했다”고 말했다. 자동차 판매 대리점 관계자 B(40)씨는 “하루 평균 3~4명이 올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없는 날도 있다”며 “예전에는 조선소 작업복을 입고 방문 당일 구매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3,000명 감원설이 나도는 울산 현대중공업은 250개, 3만2,000명에 달하는 사내 협력업체가 심각한 경영난으로 아우성이다. 65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사내 협력업체인 D기업 관계자는 “2013년부터 현중 측이 기성금액(예산)을 깎아 퇴직금 4억여원과 4대 보험이 체불되면서 매달 수 천만원의 적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현대중공업이 위치한 울산 동구 전하ㆍ방어동 일대 상가도 썰렁하다. 현대중공업 플랜트사업본부 인근에서 만난 음식점 주인 박모(57ㆍ여)씨는 “지난달부터 매출이 절반 이하로 내려갔다. 저녁 회식이 아예 없다 보니 막걸리집, 소주가게 등 주변 음식점이 문을 닫은 데가 많다”고 말했다.

인근 D자동차 서비스 김모 사장(45)도 “예전에는 차에서 이상한 소리만 나도 정비소를 찾았는데 지금은 타는데 문제없는 지만 물어보고 그냥 간다”고 사정을 전했다.

현대중공업 내부도 최근 잇단 사망사고와 경영위기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전하만과 미포만을 양쪽에 끼고 660만㎡에 자리잡은 현대중공업은 해양플랜트 공장을 포함한 10개 도크가 겉보기에는 정상 가동되고 있는 듯 했다. 내후년까지 인도해야 할 선박이 아직 123척이나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측은 토요일인 23일에도 근로자 1만여명을 출근시켜 휴일특근을 실시했지만 근무인원은 예전보다 소폭 줄었다. 그러나 당장 내년에 착공해야 하는 선박은 단 1척에 그쳐 ‘수주절벽’은 심각한 상황.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려면 매년 건조착공 선박이 50척 이상은 돼야 하기 때문이다.

겉으론 평온한 듯 보였지만 노사 간 온도 차는 극명했다. 직원들은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3,000명 감원설’ 등 닥쳐 올 위기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노조 관계자는 “현재의 위기는 2012년 조선경기가 좋을 때 설계인력을 지나치게 줄이고 선종을 다변화하지 못하는 등 경영실책에 따른 것으로, 내달 4일 출정식을 시작으로 정상적으로 임단협 교섭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사측은 반면 ‘집안이 망하게 생겼는데도 자녀들은 기둥뿌리를 뽑으려 한다’는 시각이다. 유보금을 풀어 위기에 대처하라는 노조의 주장에 대해 한 임원은 “현재 유보금은 12조4,000억원 정도로, 이중 현금은 한 달 운용자금에도 못 미치는 1조3,000억원에 불과하다”며 “노조의 시각이 너무 안이하다”고 지적했다.

조선업계의 구조조정 소식에 선박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철강도시 포항도 침울하다. 포스코 포항제철소를 제외하고 273개사가 가동 중인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이하 포항철강공단)의 올 2월말 기준 고용인원은 1만5,120명으로, 1년 전보다 880명 줄었다. 한 자릿수 감소를 나타내던 포항철강공단의 올 2월 생산은 1년 전에 비해 30.3% 감소했고 같은 기간 수출은 35.7% 하락했다.

침체된 분위기는 공단 이사장 선거에도 드러난다. 다음달 4일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22일 후보자 접수를 마감한 결과 현 이사장인 나주영 제일테크노스 대표만 등록했다.

포항철강공단 관계자는 “업체마다 자기 회사 살리기도 벅찬데 이사장에 나설 정신이 있겠느냐”며 “공단 내 많은 기업들이 지난 몇 년 간 뼈를 깎는 심정으로 구조조정을 했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울산=김창배 기자 kimcb@hankookilbo.com

거제=정치섭 기자 sun@hankookilbo.com

포항=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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