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16일 치러진 대만 선거가 첫 여성 총통 배출, 국민당의 참패로 마무리됐다. 대만 출신으로 한국과 대만을 오가며 활동 중인 양첸하오(楊虔豪) BBC중국어판 객원기자가 대만 현지에서 이번 선거 결과에 드러난 민심, 특히 청년세대의 분노를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1949년 온 대륙을 가졌던 국민당은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패배한 뒤 대만으로 도망왔다. 67년 뒤 대만섬에 줄곧 거주해 온 사람들은 표로 다시 한번 국민당을 격퇴했다. 16일 치러진 선거에서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큰 격차로 국민당 주리뤤(朱立倫) 후보를 물리치고 총통에 당선됐을 뿐 아니라, 반세기 동안 입법원(국회)을 장악해 온 국민당의 참패로 다수당 지위를 처음으로 민진당에 넘겨주게 됐다.
사실 차이잉원의 당선은 대만에서는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하지만 민진당이 국민당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패배시킨 데는 선거 직전 불거진 한 사건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바로 ‘쯔위 국기 논란’이다. 한국의 인기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인 멤버 저우쯔위(周子瑜)가 한국 방송에서 태극기와 대만(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를 흔든 것을 놓고 중국에서 “대만독립 주장”이라는 비판이 일며 중국 내 모든 스케줄이 취소돼 버렸다.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는 15일 밤 쯔위가 “중국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며 고개 숙여 사죄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유튜브 등에 올렸고, 이번에는 투표를 하루 앞둔 대만에서 파문이 일었다. 자기 나라의 국기를 흔들었다가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하자 사과한 것이 대만 국민들에게는 매우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마잉주(馬英九) 정부가 중국에 강력히 항의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가 중국에 귀순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내일 꼭 투표소에 나가 현 정부의 무능함을 심판하겠다”는 소리도 쏟아졌다.
대만 제 2대 도시 카오슝(高雄)에 거주하는 대학생 쳐우쯔팅(22)씨는 “쯔위는 아무 잘못도 없다. 분명히 대만 사람인데 왜 사과해야 하나? 난 중국사람이 되기 싫다”면서 원래 투표하지 않으려던 마음을 바꿔 선거 당일 투표소로 향했다.
수도 타이베이에서 일하고 있는 수리웨이(蘇立瑋ㆍ27)씨는 “돈을 벌기 위해 한 소녀를 이렇게 압박을 하다니, 이런 회사 정말 재수 없다”며 “사람들에게 ‘나는 중국사람이다. 양안(중국과 대만)은 하나다’는 말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 투표를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인 핀동은 최남단에 위치한 곳으로 타이베이에서 고속버스로 약 6시간 정도 소요된다.
심지어 일본에 유학 중인 청년도 15일 밤 11시에 쯔위의 동영상을 보고 당장 다음날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투표소를 찾았다. 인터넷에선 “이 동영상은 IS가 인질을 살해하기 전에 유언을 읽게 하는 모습과 똑같다”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만약 북한군이 원더걸스를 납치해 카메라 앞에서 “북한 사람으로서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하게 한다면, JYP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박진영씨나 다른 한국인들의 심정이 어떨까 생각해 보면 대만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번 사태는 수많은 대만 국민을 격노시켜 국가의 주체의식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고 중국과 거리를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민진당에게 표를 몰아주게 했다.
1949년 국민당 군대를 따라 대만으로 넘어온 외성인 후손들을 포함해 대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가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이라는 사실만 인정한다. 국민당은 당 존재의 정당성이 유지하기 위해 계속 “양안관계는 ‘하나의 중국(一中), 각자표현(各表)’의 원칙을 유치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중국 공산당 정부 면전에서 국민당은 “하나의 중국”만 언급했고 “각자 표현”이란 부분은 빼먹었기에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대만 사람들은 ‘국민당에게 완전히 속았다’고 여기게 됐고, 국민당이 국가의 존엄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이 강해졌다.
2년 전 국민당은 입법원에서 FTA와 성격이 비슷한 “양안서비스무역협정”를 강행 처리해 반발을 불렀다.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은 친중 성향인 국민당이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당과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입법원과 정부중앙청사인 행정원(行政院)을 기습 점거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무역협정의 처리는 지연되고 있고, 대만 청년세대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는 한층 높아졌다.
그후 교육부는 사회적 논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강제적으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편집강령을 수정하기로 했다. 국민당 정부는 새 교과서에 “대중국사관(大中國史觀)”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긍정적인 성과를 줄이고 국민당이 대만에서 일군 업적을 강조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고, 심지어 한 학생은 강령 철회를 주장하며 자살했다. 하지만 정부는 “그는 정서장애가 있어서 자살한 것이며 편집강령 반대운동과 연관성이 전혀 없다”면서 학생들의 강령 철회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만 사람들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혐오 정서가 이미 상식이 됐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국민당은 계속 “양안간의 왕래가 잦아지게 되면 대만 경제는 더 번영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집권 8년 동안 국민당 자신이 대(對)중국 교류사업의 이익을 독점해왔고, 경제성과는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하여 임금도 올라가지 않았다.
더구나 국민당은 길거리에 나서 시위를 한 청년층들에게 ‘폭도’의 이미지를 씌우고 “민진당의 선동 탓”이라고 주장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젊은이들은 손에 쥐어진 소중한 표를 통해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당을 심판하기에 이르렀다. 2014년 말 치러진 지방선거와 이번 대선에서 대학생이 집단적으로 버스를 예약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투표를 하자는 일명 ‘귀향투표’열풍은 어느 대학에서나 다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들은 유선전화가 없어 여론조사 대상에서 제외돼 선거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세대이자 투표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이 되었다.
민진당 관계자가 필자에게 전한 투표 결과 분석 결과는 이렇다. “저우쯔위 사태는 청년들의 귀향투표 트렌드에 이어 국민당의 양안정책에 대한 불만과 경계심이 높은 현 사회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총통뿐만 아니라 지역구 입법위원과 비례대표 정당표에 더 많은 표를 쏟아냈다. 초박빙으로 예측됐던 선거구에서도 민진당 후보들이 대부분 승리했다. 이 때문에 민진당의 입법원 의석수는 당초 예상보다 10석이 더 많다.”
2년 전 점거 행동을 참여했던 청년 첸팅하오(陳廷豪ㆍ26)씨는 “쯔위 사태는 느닷없이 국민당의 선거판세에 충격을 초래한 핵폭탄이 되었다. 이는 대만 사람들이 독립한 나라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폭도’로서 권력을 감시하는 힘이 길거리에서 국회로 전환되면서 인맥관계나 인정(人情)으로 인해 약화되지 않을까 싶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민진당의 집권으로 양안(兩岸)관계에 변화가 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총통 당선자 차이잉원은 중도 성향 유권자의 표를 모으기 위해 양안정책에 대해 줄곧 모호한 입장을 취해왔다. 그는 대만의 민주적 가치와 주권을 보호하면서도 어떻게 성공적으로 중국과의 경제적 왕래를 유치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회피해 왔다.
정책연구와 여론조사 전문기구인 대만싱크탱크(台灣智庫)의 라이이종(賴怡忠) 부대표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고 미국에도 호의를 보여주기 위해 차이잉원은 ‘92공식’(‘하나의 중국, 각자표현’)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새 정부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다른 나라와 국제에 대한 기대가 뭔지, 또 주위의 지역관계 발전을 어떻게 할지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면서 “이를 통해 대만은 세계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선거 결과는 대만 국민들이 ‘하나의 중국’을 거부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독립’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쯔위의 사과 동영상을 보고 투표하러 간 쳐우쯔팅씨는 “대만은 독립한 나라이며, 그 이름은 중화민국이다”고 하는 반면, 수리웨이씨는 “중화민국은 일본이 대만을 지배한 뒤 다시 나온 또 다른 식민지 정부”라며 “나라의 공식 이름은 대만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당을 심판한 대만 국민들, 특히 청년세대가 앞으로 대만의 정치지형과 양안관계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다만 이번 선거를 통해 어떤 의견이든, 어떤 가능성이든 억누르고 없애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며 더 자유롭게 표현되고 충분히 논의돼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신흥민주국가인 대만은 지금 새로운 경험을 통해 배우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양첸하오 BBC중국어판 객원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