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자기신체손해 고의 아니라 판단
보험사들 면책조항 빼고 보험금 지급
음주운전자 치료ㆍ보상금 年 300억대
선진국에선 무면허ㆍ음주는 보상 안 해
범죄이자 살인행위… “법률 개정을” 목소리
지난해 7월 20대 남성 L씨는 술자리 뒤에 차량을 직접 몰고 집에 가던 중 서울 마포에서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 오던 차량을 들이받았다. 상대 차량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사고 당시 L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3%. 면허 취소 기준인 0.10%를 크게 웃도는 만취 상태였다. 그런데 보험사는 상대 차량 운전자에 대한 2억2,000만원의 사망보험금과 함께 L씨에게도 보험금 2,000만원을 지급했다. 비록 가해자이지만 그도 이 사고로 1급 상해를 입었다는 이유였다.
지난해 9월 50대 후반의 남성 P씨 역시 경기 고양에서 만취 상태로 앞에 가던 차를 추돌하면서 1급 상해를 입었다. 앞 차량 운전자는 다리가 절단됐다. 하지만 P씨는 보험사로부터 치료비 전액(600여만원)은 물론 부상장해보험금(5,000여만원)까지 받았다.
최근 인천청라국제도시 한 교차로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받혀 일가족 3명이 사망하는 사고 등으로 ‘음주운전=살인행위’라는 사회적 공분이 높아지면서, 가해자인 음주운전자까지 보험으로 보상을 해 주는 것이 적절한지 논란이 일고 있다. 자동차보험의 자기신체손해나 자동차상해 보상을 음주운전자에게도 적용하면서 “불법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선량한 가입자들의 보험료 부담만 늘어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20일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음주운전 사고로 자동차보험을 취급하는 손해보험사들이 지급한 보험금은 작년 한 해 동안 3,247억원에 달한다. 특히 이 중 10%에 육박하는 321억원이 가해자인 음주운전 당사자에게 지급됐다. 2011~15년 5년치 통계를 봐도 매년 음주운전에 따른 보험금 지급액이 3,000억원대, 가해자에게 지급된 보험금이 300억원대를 유지하는 등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다수 선량한 자동차보험 가입자들이 불법 음주운전자의 치료비를 대주고 있는 셈이다.
보험사들이 음주운전자의 피해나 손해에도 보상을 해 주고 있는 건 현행법과 대법원 판례 때문이다. 상법 732조2항은 ‘사고가 보험계약자 또는 보험수익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해 발생한 경우에도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음주운전자의 중과실로 인한 사고에 대해서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 고의에 의한 사고의 경우 가해자에 대한 보험금 지급 책임이 없는 만큼 음주운전 사고를 고의로 볼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만, 대법원은 이를 고의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대법원은 1998년 “피보험자가 무면허나 음주운전을 하는 데는 고의가 있을지 모르나 그 자신이 다치는 데에는 고의가 없을 수도 있다”며 음주운전자에게도 자기신체손해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전까지 음주운전에 대한 면책조항을 자동차보험 약관에 넣었던 국내 손보사들은 대법원 판결 이후 관련 규정을 삭제했다.
이는 주요 선진국들이 음주운전자는 보상에서 제외하는 것과 대비된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보험약관에 명시적으로 무면허와 함께 음주운전에 대한 보험금 지급에 대한 면책조항을 두고 있고 법원에서 그 효력도 인정받고 있다. 영국 역시 약관에 ‘음주 또는 약물’의 영향으로 발생한 사고에 대해 보험사에 보상책임을 면제해주고 있다. 독일의 경우 선택적이기는 하지만 보험 가입 시 ‘음주운전에 대해 보상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동의를 받고 있다.
음주운전 폐해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법 개정 등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점점 힘이 실리는 모습이다. 음주운전자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쪽으로 법을 고치면 음주운전 감소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거란 분석도 나온다. 이성남 목포대 교수(금융보험학과)는 “상법 규정은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의 피해를 보상해주는 문제를 안고 있다”며 “음주운전자에 대한 보상 여부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거쳐 법 개정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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