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덕후’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숨겨왔던 자신의 ‘덕후 기질’을 드러내고 대중의 반응을 즐기는 추세다. ‘덕밍아웃’(덕후가 커밍아웃하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은 예상외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이들은 솔직한 모습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고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했다.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의 변형이다. 오타쿠는 특정 분야에 몰두하는 이들을 통칭해 부르는 말로 1983년 한 일본 칼럼니스트가 공식 언급하면서 널리 퍼졌다. 해당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까지 겸비한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즐기는 데 초점을 맞추는 ‘마니아’와는 차별된다. 한국에는 2000년대 중반 용어가 들어왔는데 오타쿠를 변형해 오덕후, 줄여서 덕후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덕후의 의미가 좀 달라졌다. 덕후들이 다른 이들과 자신의 관심사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문화가 확산되면서 덕후는 사회부적응자 이미지를 탈피해 자신의 취미를 건강하게 즐길 줄 아는 현대인으로 변신했다. ‘성덕’(성공한 덕후를 뜻하는 신조어)의 등장도 한 몫 했다. 연예계 덕밍아웃이 늘면서 그야말로 덕후 전성시대가 열렸다.
방송사도 덕후를 양지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MBC ‘능력자들’은 연예인과 일반인이 만나 서로의 덕후력을 검증하는 프로그램으로 숨겨진 스타 덕후를 소개해 1회부터 화제를 모았다. 연예인이 먼저 자신의 덕후 기질을 뽐내는 경우도 있다. FT아일랜드의 리더 최종훈은 네이버V앱 FT아일랜드 채널에 ‘최리다의 덕밍아웃’이라는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자신의 레고 조립 취미를 공개했다.
스타 덕후들은 어떤 취미에 빠져있으며 그들의 덕후력은 일반인과 어떻게 다를까. 또 왜 유독 연예계에는 키덜트족(장난감, 만화 등 유년시절 즐기던 문화를 찾는 어른)이 많은 걸까. 연예계 덕후 세계의 면면을 파헤쳐봤다. 기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의 용어설명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 덕후 용어사전
알고보면 ‘진성 덕후’…스타들의 이색 취미
연예계엔 피규어·프라모델을 수집하는 이들이 많다. 가수 이승환은 피규어 수집에 최소 3억원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1년 한 방송에서 “소장하고 있는 피규어만 800여개다. 장난감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배우 지진희는 레고 덕후다. 단순히 조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명 레고 동호회 회원 자격으로 전시회에 참여한다. 중고로 레고를 구입해 조립한 후 높은 가격에 되팔기도 해 생산적으로 취미를 즐기고 있다. 최근에는 2년에 걸쳐 조립한 영화 스타워즈의 우주선 ‘밀레니엄 팔콘’을 싱가포르의 한인 사업가에게 판매했다. 이 외에도 배우 이시영, 박해진, 가수 케이윌,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등이 피규어, 프라모델 수집을 즐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스타에게서는 누구보다 진한 덕후의 향기가 난다. 일반인의 접근성이 높은 다른 분야에 비해 애니메이션은 더 깊은 관심과 시간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수 데프콘은 일찌감치 ‘아스카 덕후’를 자청했다. 여러 방송에서 ‘에반게리온’의 아스카를 좋아하는 모습을 드러내 2013년 '2013 부천 국제학생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홍보대사로도 위촉됐다. 그는 2013년 MBC ‘나 혼자 산다’에서 “혼자 사는 남자가 아직도 열정에 빠질 수 있다는 건 좋은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최근 급부상한 애니 덕후로는 배우 심형탁이 있다. 심형탁은 고등학교 때부터 ‘도라에몽’을 좋아한 ‘진성 덕후’다. 인형, 피규어, 침대보, 속옷 등 ‘도라에몽’과 관련된 제품은 모두 수집해 팬클럽 이름조차 ‘도라에탁’일 정도다. ‘원피스’를 좋아하는 배우 강동원은 지난해 ‘원피스 특별 전시회’에 등장했다는 목격담이 퍼지기도 했다.
흔한 컴퓨터 게임에서도 남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슈퍼주니어의 규현은 프로게이머 서경종, 김택용 등과 친구가 될 정도로 ‘스타크래프트’를 즐긴다. 종종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 스타크래프트 리그전에도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푹 빠진 가수 은지원의 경우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은지원을 모델로 ‘은초딩’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줄만큼 덕후력을 입증한 바 있다.
의외의 인물도 있다. 요리에만 빠져 살 것 같은 사업가 백종원은 사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유저다. 아내 소유진과 게임을 끊기로 약속했지만 최근 게임 전용 마우스를 들키면서 그의 비밀스러운 취미도 들통났다. 그의 게임 속 캐릭터 이름은 ‘밥장사’다.
이 외에도 운동화 수집을 즐기는 빅뱅 지드래곤, 하이힐을 모으는 가수 서인영, 핑크색에 집착하는 소녀시대 티파니, 심슨 관련 상품을 모으는 씨엔블루 정용화 등 스타 덕후는 다양한 분야에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스타는 왜 덕후가 됐나
연예계에는 아직 노출되지 않은 숨겨진 덕후들도 많다.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스타들이 왜 덕후가 된 걸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공인들은 인기에 대한 불안감, 긴장감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매개체가 절실한데 얼굴이 알려지다 보니 밖에서 하는 활동은 한계가 있다”며 “집 안에서 즐길만한 놀이를 찾다 보니 덕후 문화에 빠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최근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스타가 취미를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덕후 기질을 공개하고 있다.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을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움직임이다. 받아들이는 대중도 스타의 인간적인 면모에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다. 곽 교수는 “지금은 노출사회다. 자기자신을 드러내고 그대로 맞춰서 살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덕밍아웃이 늘고 있다”며 “최근엔 사회에 다양한 특성과 형태를 지닌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독특한 개인의 관심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회원 96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가 ‘나는 덕후 기질이 있다’고 답변한 것으로 드러났다. ‘앞으로 덕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무려 77%에 달했다. 아스카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프콘이 멋있어 보이는 건 어쩌면 우리 안에 숨겨진 덕후 기질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예계 안으로나 밖으로나 덕후들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소라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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