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엔 연평균 8차례나
그리스 긴축 이엉 브렉시트까지
잦은 투표로 정책 일관성 해치고
이익집단 정당화 수단 전락하기도
정치 견제 안전밸브 역할론도
“존재 자체로 입법 뒤집힐 수 있어
선출된 대표자 시민 의식 효과”
美 포린 어페어스 비판론에 제동
영국과 유럽의 운명을 결정하는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앞두고 국민투표 자체가 도마에 올랐다. 2015년 그리스의 긴축정책 국민투표에 이어 유럽연합(EU)을 무너트릴지도 모르는 국민투표가 연이어 일어나자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 등 보수지들이 일제히 “유럽에서 국민투표가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다”며 ‘국민투표 무용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대의제 하에서 제한적인 국민투표는 선출된 대표자를 견제할 수 있는 무기로서 가치가 있다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난무하는 국민투표, 유럽 통합 흔들어”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직접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안착한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하고라도 유럽의 국민투표는 과잉이다. 1970년대에 연평균 3회 열렸던 국민투표가 2010년대에는 연평균 8회 열린다.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헌법을 제ㆍ개정하던 90년대 초와 비슷한 수준이다. 23일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외에, 이탈리아는 10월 전까지 개헌투표를 마칠 계획이고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EU의 이민자 할당정책에 반대하는 국민투표를 준비하고 있다. 네덜란드 활동가들은 EU-캐나다 자유무역협정과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에 대항해 국민투표를 준비하고 있다.
국민투표는 대표자를 뽑는 일반적인 대의제 선거와 달리 국민이 직접 정책을 결정하는 투표기 때문에 해당 사안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최근 급증하는 유럽의 국민투표는 시민참여보다는 정치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분노를 동력으로 삼는다. 유럽 전역에서 전통적인 보수정당은 지지기반을 잃고, 극좌ㆍ극우정당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반EU’ 깃발 아래 하나로 묶인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때 유럽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했던 EU가 이제 엘리트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유럽정서에 부합하고 있다. 이탈리아인의 58%, 프랑스인의 55%가 EU 회원국 지위를 국민투표에 부치고 싶어한다. 때문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 주류 정치인들이 비판의 소나기를 회피하지 못하고 국민투표에 기대는 것이다. 물론 오르반 총리 같은 유럽회의주의자들도 EU에 흠집을 내기 위해 국민투표를 동원한다.
나아가 이코노미스트는 잦은 국민투표가 일관성 없는 정책을 유발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주민들은 감세와 주정부 지출 증대라는 상호 모순된 정책을 동시에 지지해왔다. 네덜란드 국민은 올해 4월 EU-우크라이나 협력협정에 반대했지만 다른 EU 회원국 27개국이 찬성했기에 결국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사례는 2015년 그리스 긴축재정에 대한 찬성 여부를 물었던 국민투표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긴축정책 반대라는 국민투표 결과를 무기로 독일과 프랑스 등이 요구해 온 긴축정책을 막아보려 했지만, 현재는 오히려 유럽의 기존 제안보다 더 과격한 긴축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국민투표가 정치참여를 늘린다는 상식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EU-우크라이나 협력협정에 반대한 네덜란드 국민투표의 총투표율은 32%로, 법적 효력이 발휘되는 선인 30%를 간신히 넘었다.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방정부에 의해 추진된 해양플랜트 영업 지속 여부를 물었던 국민투표 역시 투표율이 50%에 미치지 못했지만 약 3억유로의 추가비용을 유발했다. 국민투표는 해당 주제에 무관심한 국민들이 많을 경우 오히려 소수의 이익집단이 휘두르는 무기로 전락하기 쉽다.
무엇보다 국민투표의 비판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대의제의 붕괴로 인한 대중 추수주의의 득세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나치게 잦은 국민투표는 직업 정치인들의 역할을 쓸모 없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직접민주주의를 경계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영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는 1774년 연설에서“정치인의 역할은 대중의 의견이 아니라 결정을 대신하는 것”이라며 “대중의 입장에 맞춰 자신의 입장을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직무유기이자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했다.
“대의제 보완재인 국민투표 문제삼는 건 핑계”
반면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는 국민투표 비판론에 제동을 걸고 있다. 국민투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화정의 선출직 대표자들이 시민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민주주의는 대의제다. 그럼에도 국민투표라는 제도가 남아있는 것은 시민이 대표자를 견제할 최후의 ‘안전밸브’를 남겨두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포린 어페어스에 따르면 대의제는 근본적으로 유권자들이 정치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선출된 공직자는 공약을 남발하고 일단 당선된 후에는 실제 정책을 집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임기가 한정돼 있기에 장기적인 공약보다는 당장의 성과에 집중할 유인도 있다. 또 정치인들은 먼 차기 선거보다는 가까운 로비에 더 이끌린다. 결국 정치인들은 다수보다 훨씬 실패하기 쉬운 구조다. 이럴 때 국민투표로 자신의 입법이나 정책이 뒤집힐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인들은 국민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지적이다.
국민투표가 대의제를 보완하는 제한된 역할만을 맡는 현실에서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문제삼는 것이 타당한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무지한 시민들이 국민투표로 EU를 파괴한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대의제 하에서 자신들의 정치력으로 EU를 지키지 못하고 국민투표에 기댄 것은 정치권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영국의 EU 잔류를 주장하는 캐머런 총리는 자기 정당인 보수당 당내의 브렉시트 분파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국민투표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포린 어페어스는 “에드먼드 버크 같은 사람들만 뽑을 수 있다면 대의제를 전적으로 믿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모든 정치인이 버크처럼 위대할 수는 없다”며 “제도적 제한을 통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고, 정치 참여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주장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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