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 아픔 외면한 ‘법치’ 주장은 폭력
특별법 재합의 성사돼도 앞길 더 험난
대통령ㆍ여당이 먼저 유족들 손 잡아야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8일 방한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기내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교황과 함께한 4박5일간 오래 가슴에 새겨야 할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내게는 이 말의 울림이 가장 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 채 304명의 귀한 생명이 물 속에 잠기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던 그날 이후 기자로서, 이 나라 국민이자 단원고 희생자들 또래의 아이를 둔 엄마로서, 나는 무엇을 했고 해야 할 무엇을 하지 못했던가 곱씹어 보게 했다.
자성의 끝에 궁금증도 일었다. 세월호 유족에게 받은 노란 추모 리본을 가슴에 단 교황에게 “중립을 지켜야 하니 리본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청했다는 사람은 누구일까. 직업적 본능 혹은 속된 호기심으로 그 누군가의 신상을 털겠다는 심사가 아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든 세간의 우려를 전한 것이든, 정작 정치의 힘이 가장 필요한 이 때에, 추모의 뜻마저 나쁜 의미의 ‘정치적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답답하다. 이제 겨우 127일이 지났을 뿐인데, 아직 10명은 가족의 품에 안기지도 못했는데, 안전한 나라로의 항해는커녕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캐고 밝힐 첫걸음조차 떼지 못했는데, 실체도 불분명한 ‘세월호 피로감’이란 말이 유령처럼 우리 주변을 맴도는 현실이 무참하다.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혼돈이 극심하다. 개인적으로는 특별법을 만드는 궁극적인 목적이 철저한 진상규명에 있고, 그러려면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을 부여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잘못된 공천 등 선거전략의 실패가 빚은 7ㆍ30재보선 참패를 ‘세월호 민심’의 변화 탓인 양 오판해 특검 추천권 문제로 협상의 주된 의제를 틀어버린 게 문제였다고 본다. 여야가 한차례 합의 파기를 거쳐 ‘극적으로’ 타결했다는 재합의안이 과연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안 방안인지 솔직히 의문이다.
물론 정치란 갈등과 타협을 통해 최선 아니면 차선의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제 주장에 얽매여 옳고 그름이나 선악의 잣대로 재단할 일은 아니다. 재합의안이 ‘새누리당의 백기투항’이라는 평가는 가당치 않지만,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로 일말의 성의는 보인 게 사실이다. 유족의 반대를 1차 합의 파기의 명분으로 삼고도 재합의 과정에서 똑같은 우를 범하고 뒤늦게야 유족을 설득하느라 부산을 떠는 새정치연합의 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혼란과 갈등이 야당만의 탓인가. 40일 가까이 제 목숨을 건 단식까지 해가며 진상규명을 위한 최선책을 바라는 유족들의 요구가 터무니없는 몽니인가. 합의와 재합의의 한쪽 당사자인 새누리당이 유족 설득을 야당에만 떠맡긴 채 뒷짐 지고 성토만 해대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치의 실패를 꾸짖자면 집권여당의 책임이 더 크지 않은가.
새누리당은 유족들의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법치’를 내세운다. 진상조사위 수사권 부여는 전례도 없거니와 형사사법체계를 흔들 수 있고 특검 추천 절차 역시 특검법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어이없게 피붙이를 잃은 유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바닥을 드러낸 정부ㆍ여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법치만 들먹이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폭력일 뿐이다. 유족들이 고심 끝에 재합의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끝이 아니다. 더 험난할 앞길을 헤쳐 가려면 이제라도 정부ㆍ여당이 나서 유족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어떤 사회가 훌륭한가를 판단하려면 그 사회가 가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 그리고 가난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된다.” 널리 회자돼 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다. 그는 “정치적 책임을 가진 모든 이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common good) 두 가지를 기억해주기 바란다”고도 했다. 세월호 유족을 위로한 교황에게 감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유족들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박근혜 대통령, “합의를 깨면 정치가 아니다”는 말만 되뇌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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