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H.M.으로만 알려진 미국인 헨리 몰레이슨(1926~2008)은 27살 때인 1953년 간질 발작을 억제하기 위해 대뇌의 해마 영역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발작은 멎었지만 소중한 기억력을 잃었다. 만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고, 대화를 해도 그 순간만 응대할 뿐 대화한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밥을 먹거나 주변을 산책해도 매번 처음인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어릴 때의 사건 등 수술 전의 일은 기억하고 있었고, 여전히 추론과 대상인식, 반사행동, 언어능력 등은 잃지 않았다.
▦ 대뇌피질 측두엽 깊은 곳에 자리한 해마가 기억의 첫 단추이며, 모든 기억 작업은 해마의 스위치가 켜지면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H.M. 덕분이었다. 기억은 오감을 통해 받은 외부 자극이 해마에서 전기신호로 바뀌어 저장됐다가 중요한 것만 추려져 대뇌피질에 계속 저장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기억이 해마에서 머무는 기간은 1개월에서 몇 개월 정도라 한다. 통상 기억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일화 기억’, 학교 교과과정에서 배우는 것과 같은 ‘의미 기억’, 외부 자극을 감지해 반응하는 ‘절차 기억’으로 나뉘는데 특히 일화 기억은 정서적 반응과 직접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
▦ 캐나다 심리학자 엔델 털빙은 “기억이란 정신 속에서 진행되는 시간여행”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현재에 다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억이 시간여행을 하면서 변형된다는 점이다. 한번 저장되면 영원히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회상하는 주체와 순간에 따라 달라진다. 시간이 지나 잊혀지는 탓도 있지만 조각 형태로 저장된 정보를 재구성해 되살리는 과정, 현재의 처지를 합리화하려는 무의식적 욕구 등이 작용해 입력 때보다 출력 때의 감정이나 판단이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세월호 기억저장소’가 경기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개관해 다음달 초 일반인에게 공개된다고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가 국민성금으로 각종 추모 기록물들을 모아 전시하는 곳이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넘어 참사 당시 국민이 느꼈던 비통함과 분노, 비극의 교훈까지 기억의 왜곡ㆍ변형에 맞서 온전히 지켜내는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 ‘정신 속 시간여행’에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거나 “기억이 속임수를 쓴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박진용 논설위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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