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건축가와 건축 전문기자의 비극적인 죽음 같은 믿기 힘든 일도 있었지만, 2014년은 건축이 문화의 한 부분으로 완전히 자립잡기 시작한 해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서울시청사와 DDP를 둘러싼 논란과 건축가를 다룬 영화 등이 건축에 눈을 뜨게 했다면, 이제는 건축을 향유하고 이해하는 쪽으로 물꼬를 튼 듯한 양상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이 영예의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주요 전시장은 건축 관련 전시를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건축이 빠진 공공 예술프로젝트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국립현대미술과 서울관에서는 ‘장소의 재탄생:한국근대건축의 충돌과 확장’으로, 과천관에서는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조화:건축가 김종성’으로 관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플라토 미술관은 건축가 조민석의 작업을 다룬 ‘매스 스터디스 건축하기 전/후’를 전시중이다. 이 전시는 한국 사회에서 달라진 건축의 입지를 잘 보여준다.
플라토 미술관(구 로댕 갤러리)의 글래스 파빌리온은 로댕의 ‘지옥의 문’을 상설 전시하기 위해 고층 빌딩 숲 사이에 들어섰다. 건물은 로댕의 걸작을 보호하고 원활한 관람을 위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역할이었다. 사설 미술관의 엄격히 통제된 공간이었던 이곳이 이번 전시회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조민석은 뉴욕과 밀라노 등지에서 실험한 바 있는 공공 프로젝트를 미술관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전시 기간 동안 글래스 파빌리온을 공공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미술관은 매표소를 안으로 옮겨 파빌리온에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하자는 건축가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후문이다. 훌라후프 1,000여개를 집타이로 묶어 만든 지름 9㎙ 돔형 구조체 ‘링돔’은 글래스 파빌리온 전체를 전시장 입구의 공용홀로 바꿔놓았다. 미술관 안에 새롭게 만들어진 돔에서 간담회, 워크숍 등의 다양한 행사가 개최될 것이라고 한다.
광장이나 거대한 아케이드 같은 공공 공간에 설치해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빚어내고 이로써 다양한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건축의 기본 전략이다. 남대문로를 지나는 많은 이들이 보고 참여할 수 있도록 외부 공간에 설치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내부로 들어온 링돔 역시 흥미롭다. 그 동안 미술관의 주인공이었던 ‘지옥의 문’은 더 높고 큰 링돔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역시 로댕의 걸작인 ‘칼레의 시민’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돔 근처로 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미숙련 노동자가 값싼 재료로 만든 임시 구조물에 제 자리를 내준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링돔은 공공 프로젝트의 성격을 잃고 아트 오브제로 격상될 위기(?)에 처한 것도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공개된다고는 하지만 불투명 유리막 뒤에 자리한 탓에 전시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이들이 이 공간을 점유할 가능성은 낮다. 또 미술관 내부의 특유의 분위기와 로댕의 아우라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시장으로 들어간 건축이 처한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몇몇 전시는 건축을 아트 오브제처럼 다룬다. 건축가들도 건축주의 변덕과 취향, 빠듯한 예산, 까다로운 법규 등을 잠시 제쳐두고 건축가 고유의 아이디어와 건축만의 내적 논리를 제시하기를 원하기도 한다. 이 과정 역시 필요한 일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다시 현실에 적용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축에 대한 관심을 건축 내부의 논리로 가둬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대규모 재개발이 끝난 지금 한국 사회는 거의 처음으로 건축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는 중이다. 건축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집이 더 이상 재산 축적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걸 인식할 때에만 공간의 질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다. 언제든 이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시절 공간에 대한 투자는 낭비였을 따름이다. 싹트기 시작한 관심을 도시와 건축에 대한 애정과 비판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보잘것없는 공간에서 지내면서 수준 높은 건축을 영화나 미술 보듯 대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도시와 건축 공간에서 매일같이 지내는 것이 더 근사한 법이니 말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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