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다. 총투표수 203표 가운데 찬성 107, 반대 90, 무효 6표. 당시 여야 의석분포로 보면 여당인 공화당 찬성표가 20표를 넘은 것으로 분석됐다. 이른바 ‘10.2 항명 파동’이다. 공화당에 오치성 장관 해임안을 부결시키라고 지시한 박정희 대통령은 격노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항명 주동자를 색출해 엄중히 조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당장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갖은 고문과 수모를 당했다.
▦ 항명을 주도한 인사들은 당시 공화당 실세 4인방으로 불렸던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 의원이었다. 3선 개헌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그 공을 내세워 위세가 하늘을 찌르자 박 대통령은 오치성을 내무장관에 기용해 그들의 수족을 자르는 임무를 맡겼다. 이에 반발한 4인방은 야당이 실미도 사건 책임 등을 물어 제출한 오 장관 해임안 가결로 분위기를 몰아갔던 것. 이를 용납할 박정희가 아니었다.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계를 은퇴해야 했고 공포정치 앞에 국회도 권위와 힘을 잃었다. 그렇게 박정희 종신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의 길이 열렸다.
▦ 9일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항명도 정치사에 오래 남을 사건이다. 물론 권위주의시대 권력암투와 음습한 공포정치의 산물이었던 10.2 항명 파동과는 성격이 다르긴 하다. 그러나 청와대 기강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대통령의 리더십과 장악력에 심대한 타격을 준 사건이어서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다. 더구나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를 통해 항명 전말이 공공연하게 드러났으니 국민이 받은 충격은 한층 컸다. 이 정권 청와대 근무자들의 대 국회 인식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 박근혜 대통령이 이 파동을 어떻게 수습할지 궁금하다. 아버지 시대엔 항명사태를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을 동원해 처리하고 다음 단계의 통치 포석에 활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권력수단이 없다. 오히려 이번 사태로 정권의 허약한 권력 장악력이 도드라졌다. 청와대 비서실 기강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서야 향후 3년의 국정을 제대로 이끌고 나갈지 걱정스럽다. 결국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순리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 오늘 신년 기자회견에 과연 그 구상이 들어 있을까.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