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수사결과 발표와 함께 일단락된 ‘정윤회 문건’의혹은 모호한 실체만큼이나 여러 해석과 촌평이 뒤따랐지만, 기자인 내게는 다른 측면에서 한가지 깨달음을 남겼다. 아무리 노력해도 취재원을 보호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 ‘취재원 보호는 생명’이라고 여기는 입장에서 보면 그 점은 일종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달 13일 자살한 최모 경위의 죄는 세계일보 기자에게 청와대 문건을 넘긴 것이었다. 박관천 경정이 청와대에서 가지고 나온 문건의 복사본을 다른 경찰에게서 넘겨받아 친분이 있는 기자에게 전달한 것이 그의 혐의다.
취재원 색출 수사결과는 이랬다. 세계일보 기자가 “(문건을 건네준) 정보원을 만나겠다”고 알린 지난 해 5월 8일, 최 경위와 기지국 동선이 오후6시40분쯤부터 다음날 새벽 1시쯤까지 일치했고, 두 사람은 지난 1년 간 개인 명의 및 차명 휴대폰으로 약 550회 통화한 사실이 확인됐다.
최 경위가 만약 자살하지 않았다면 재판에 넘겨졌을 것이다. 세계일보 기자는 취재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지만, 연락내역을 탈탈 털어내는 검찰의 강제수사 방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외국에서는 기자가 취재원을 밝히지 않으면 (법정모독 등으로) 구속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취재원 보호를 위해 구속되고 싶어도 그럴 기회도 없는 셈이다.
자살한 최 경위와 내 취재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나에게 수사 중인 사건의 내역을 알려주거나 정부 문서 등을 건네줬던 ‘고마운’ 취재원들 상당수도 피의사실 공표, 공무상 비밀누설,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등으로 엮으려면 충분히 엮을 수 있을 것 같다(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질지는 별개라도). 친한 기자가 물어보니까 거짓말을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취재가 안돼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내가 안쓰러워서, 혹은 정말 문제가 있는 사안인데 정부가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등등 이런 저런 선량한 이유였다고 해도 말이다. 최 경위가 정윤회씨의 국정농단 내용을 사실로 믿고 언론에 고발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를 받았듯이.
그러니 내 취재원들과 최 경위의 차이는 현행법상 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최 경위는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린 내용을 기자에게 줬다는 것뿐. 오직 그것뿐이다.
지금까지 취재원을 찾아내기 위한 수사는 금기시돼 왔다. 비판기사나 내부제보가 분명한 기사가 날 때면 각 출입처에서 취재원 색출작전이 벌어지지만, 내부 단속용 조사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엉뚱한 사람이 지목되기도 하고, 기자 또한 진짜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출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취재원 색출 작전은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언론의 자유와 역할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이 공유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법은 법이고, 원칙은 원칙’이라고 취재원을 찾기 위해 강제 수사를 동원할 경우 발생하는 부작용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 베트남전 종식에 기여한 1971년 뉴욕타임스의 ‘펜타곤 페이퍼’보도부터,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도ㆍ감청을 폭로한 가디언과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는 언론에 정보를 제공한 내부고발자들에서 시작했다. 이런 세계적인 특종들은 결국 내부고발자의 면면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사회고발은 ‘익명보호’를 원하는 취재원들의 역할이 크며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면 언론도 존재이유가 없다.
만약 최 경위가 세계일보 기자에게 건넨 ‘정윤회 문건’의 내용이 사실이었다면 어땠을까. 현행법을 어겼다고 해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고발하고 그에 따른 쇄신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문건 내용은 허위로 결론 났고, 허위 문건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이를 언론에 건넨 최 경위는 그에 걸 맞는 동정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됐지만.
검찰을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국기문란”이라고 처벌하라 하고, 또 실정법 위반이 맞으니 내몰려 수사한 것을 두고 수사팀을 지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검찰 내부에서도 “검찰 참 무섭다”는 말이 나온다. 이를 주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농담도 하며 여유가 넘쳐 보였다. 무서울 것이 없는 권력의 꼭대기에서 보자면 기자의 마음을 치는 취재원 한 명의 죽음 따위 이미 잊어버렸겠지.
이진희 사회부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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