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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과거사·배상 '오리발' … 그 뒤엔 美의 뿌리깊은 '짬짜미'

입력
2015.02.1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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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화근… 日 '한국 강화조약 참여 배제' 로비

美·日 식민지 처리문제 '공범' 美, 한일 과거사 갈등 때마다 '어정쩡'

1951년 대일 강화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덜레스(왼쪽) 미 국무부 고문을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가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청 자료
1951년 대일 강화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덜레스(왼쪽) 미 국무부 고문을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가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청 자료

1965년 한일협정은 흔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부산물로 통한다. 실제 1951년부터 65년까지 14년 간 전개된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한일회담)은 1951년 9월8일 48개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어떻게 한일관계에 적용할지를 논의한 회담이었다. 전후 한일관계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제의 일각으로 간주되는 이유이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규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패전국 일본에 대해 ‘관대한’ 배상을 허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특징을 갖는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우선 제2조에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이 조항으로 인해 일본이 한반도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말함으로써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했고, 일본이 포기할 지역으로 독도를 적시하지 않아 영토 분쟁의 빌미를 일본에 제공했다.

더욱이 제4조 (a)항에서는 재산 및 청구권의 처리를 “일본국과 당사국 간의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고 규정, 전후 한일관계를 식민지 청산을 위한 관계가 아니라 한국의 독립에서 비롯된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로 묶어 놓았다. 실제 한일회담은 이 조항에 언급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특별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열렸고, 그 결정판이 바로 1965년 한일협정이다. 다만, 강화조약은 같은 조 (b)항에서 “일본은 (중략) 미국 정부에 의해 또는 그 지령에 의해 행해진 일본국 및 그 국민의 재산 처리의 효력을 승인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은 한국측의 외교적 노력에 의해 강화회의 막판에 극적으로 삽입됐는데, 이로써 한국은 일본 패전 후 국내에 남겨진 일본인 사유재산을 귀속시킨 조치를 국제적으로 승인 받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이 조항을 근거로 미군정 기간 일본의 동의 없이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을 몰수하고 이를 한국에 넘겨준 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을 면하게 됐다. 그 외에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통상 등의 이익을 얻는 조항을 재확인한 제21조를 제외하면 강화조약은 한반도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 문제가 아예 누락됨으로써 한반도는 단지 제국주의 전쟁의 전후처리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강화조약을 주도한 미국은 일제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한국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1947년 8월4일자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SCAPIN) 1757호는 연합국, 중립국, 적성국의 세 범주에 속하지 않는 ‘특수지위국가’로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태국 등과 함께 ‘조선’을 포함시켰다. 이는 조선이 일본의 과거 식민지로서 당시에는 연합국의 점령 하에 있는 비독립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관측된다.

미국은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해방국’ 한국을 강화회의에 참석시켜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1949년 11월 무초(John Muccio)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이 일본인 재산(이른바 적산)을 취하는 대신 일본에 대한 배상요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한국의 강화회의 참가를 용인할 것을 미 국무부에 권고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미 국무부 극동조사국은 ‘대한민국의 대일강화조약 참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한국에 대한 배상은 한국이 직접 청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등 다른 연합국에 할당된 배상에서 제공된다”고 말해 한국이 강화회의에 참가해 별도로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는 데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 보고서는 또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들은 1910년 일본의 한반도 병합을 승인했다”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한 뒤 “일본의 통치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은 제한된 지역에서의 단기간의 소요에 불과했다”고 밝혀 한국의 교전국 지위를 부인했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일본 외교사료관 자료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일본 외교사료관 자료

강화조약의 최종 초안이 확정되어 가던 1951년 7월3일에 작성된 또 다른 미 국무부 문건은 “조선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에 의해 점령된 국가가 아니다”면서 한국의 강화회의 참가 자격 자체를 문제시했다. 요컨대 미국은 한국의 경우 이미 전쟁 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사실상 일본의 일부로서 전쟁에 가담했으므로 배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의도를 추종했기 때문일까 한국 정부 또한 한일회담에서 35년간의 일제 식민지 기간 전체가 아니라 1937년 중일전쟁부터 일본이 패전한 45년까지의 시기, 즉 일본의 전쟁시기만을 대상으로 일본에 청구권을 제기했다. 일제 강점기 전체에 대한 논의는 문화재 문제 등으로 제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 미 국무부가 작성한 강화조약 초안에는 한국도 조약 서명국으로 추가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강화회의 참여는 1951년 6월 중국 공산당 정부와 대만 국민당 정부의 강화회의 참여 논란과 맞물리는 가운데 영국의 반대 등으로 결국 좌절되고 만다. 이는 이후 열린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이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는 근거가 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일본의 ‘한반도 병합’을 인정한 미국의 식민지주의가 기능했다는 것이다. 강화회의 준비와 강화조약 작성을 주도한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 국무부 고문의 식민지 지배 인식이 그 단서를 제공한다. 덜레스는 1950년에 출판된 저서 “전쟁이냐 평화냐”에서 구미의 식민지 지배사를 다음과 같이 그렸다.

“과거 수세기 동안 서구 제국은 물질적, 지적, 정신적으로 활발함을 유지한 결과, ‘미개발 지역’에 철도, 항만, 관개사업 등 거대한 투자를 전개했다. 하지만 이를 순조롭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나 통화(通貨)의 교환성 등에 대해 충분한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따라서 서구 제국은 무역이나 투자에 필요한 정치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아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세계의 사람들을 통치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는 서구 제국에 의한 ‘화려한 정치활동의 무대’였다”. 다시 말하면 덜레스에게 ‘서구 식민지주의’(Western Colonialism)는 서구의 정치경제적, 문화적 우월성에 기인한 불가피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인류 공영과 발전에 기여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덜레스를 상대로 일본은 한국이 강화조약에 참여해 과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집요한 로비를 전개했다. 일본측은 1950년 6월19일 강화준비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덜레스에게 “분리 지역의 당국이 일본 본토에 존재하는 재산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우려된다”면서 한국측 요구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이에 대해 덜레스는 “한국 정부로부터 이미 광범위한 청구권이 몰려오고 있다”면서 “미국은 한국이 이미 ‘분리’ 지역에 존재하는 일본의 자산을 얻었으므로 추가로 일본에 있는 자산까지 그 청구권을 확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본을 안심시켰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일본 총리는 1951년 4월 재차 일본을 방문한 덜레스에게 “한국은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한국인들이 연합국과 동등한 재산 청구권과 배상금을 주장할 것이다, 재일한국인이 100만 명이나 되는데 이 사람들이 증명할 수 없는 과도한 배상 청구를 하면 일본은 혼란을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의 강화조약 참여를 막으려 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의 측면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앞서 1947년 2월10일 체결된 이탈리아 강화조약을 실질적으로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강화조약은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이 점령한 알바니아 및 에티오피아와 그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된 리비아 등에 대한 조치를 명확히 구분했다. 즉,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에 대해 배상 지불을 결정했지만, 이는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침략 전쟁에 대한 것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은 아니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후의 강화조약은 모두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불문에 부쳤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은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대립적이었지만 식민지 처리 문제에서는 이해를 공유하는 ‘공범 관계’였다.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으르렁거릴 때마다 미국 정부가 지역 안정과 ‘미래지향’만을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과거 식민지주의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스스로의 인식과 무관치 않다. 한국측의 ‘해방의 논리’는 결국 식민지 지배를 당연시해온 일본과 미국의 ‘짬짜미’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셈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같은 날 체결된 미일안보조약과 함께 한미일 안보체제를 구축하는 토대를 제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동아시아에 정치군사적 대립을 고착시켰다는 불편한 지적과 더불어, 과거사에 아예 눈을 감음으로써 ‘역사 분단’까지 낳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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