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 마음을 헤아릴 길은 없다. 지난 1년간 진실규명을 둘러싼 지루하고도 고단한 싸움에 지쳐 이젠 피로감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부모의 애끊는 심정에 전염되는 먹먹함을 피할 수 없다. 어느 순간 그 절절한 사연들을 외면한 것도 평정을 찾기 위한 방어기제일 것이다.
다시 잔인한 눈물의 계절이 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하려 한다. 교사인 아들의 희생정신을 위안 삼아 꿋꿋이 버티는 부모의 자세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 부모의 말을 직접 들은 적도 없지만 의연한 언행에 매번 먹먹함과 숙연함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며칠 뒤 이 부모는 생사를 모르는 아이들이 많은 데 숨진 아들의 빈소를 먼저 차려 죄송하다고 했다. 빈소에는 ‘조의금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어머니는 기자들에게 “의롭게 갔으니 그걸로 됐다”고 했고, 아버지는 “아이들을 놔두고 살아 나왔어도 아들이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전원 구조 소식에 안심하다가 수백 명의 아이들이 객실에 갇혀 있다는 말을 뒤늦게 들었을 때 아버지는 ‘내 아들도 함께 있겠구나’하고 직감했다고 한다. 기자의 교사 친구들로부터 많은 교사의 마음을 울리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 말이라고 들었다.
의로운 죽음에 누를 끼칠 수 없기에 슬픔을 견디고 있지만 자식의 죽음에 세상의 빛을 잃는 슬픔(喪明ㆍ상명)이며, 어떤 일보다 참혹하고 서러운 변고(慘慽ㆍ참척)라는 말을 달리 붙였겠는가. 사고 며칠 뒤 그 아버지의 친구가 인터넷에 올린 카카오톡 메시지에는 아픔을 누르는 마음이 더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정녕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이라고 친구가 위로하자 아버지는 “친구들, 위로의 말씀들 고맙네. 죽느니만 못한 삶을 포기한 아들이 자랑스럽네. 그래도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네그려”라고 답신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해 11월 평화신문에 쓴 ‘하늘로 띄우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부모님에게 둘도 없는 자식이듯 모든 학생 또한 그들의 부모님들에게는 귀한 자식이라는 생각에 어떤 아이에게도 소홀히 할 수 없어요”라는 생전 아들의 말을 되새기면서 “아빠 말대로 참 스승의 모습으로 남아줘서 자랑스럽다” “끝까지 정의로운 모습으로 엄마 아빠가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해줘서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럼에도 “네 이름을 다 부르기 전에 엄마는 또 눈물을 쏟는구나” “네가 마음 아파할 줄 알면서도 아직은 너무 보고 싶어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구나”라는 대목에선 상명과 참척의 심정이 절절하다.
안산지역 다문화가정 학생들에게 더 많은 배움을 주기 위해 아들이 편입해 한국어 교육을 받던 서울문화예술대에서 위로금을 걷었을 때 부모는 수 천 만원이나 되는 돈을 장학금으로 도로 이 학교에 기탁했다. 아버지는 이 자리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아들이 죽음이 헛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었다. 의인의 모교인 국민대는 그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교직 이수 학생 10명에게 주기로 했다. 지난 6일에는 그가 수학했던 영어영문학과 강의실에 그의 이름을 붙인 현판을 걸기로 했으니 부모의 바람이 다소나마 이루어졌다.
세월호 참사 당시 숨진 안산 단원고의 고 남윤철(35) 선생과 그의 부모다. 2학년 6반 담임이던 남 선생은 배 안에 있는 학생들을 대피시키다 정작 자신은 빠져 나오지 못했다.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남 선생은 객선 피난비상구 쪽에 있어 충분히 대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몸에 물이 차오르는데도 제자들의 탈출을 일일이 챙기며 선내에 남았다고 한다. 제자 사랑과 스승의 도리를 몸으로 실천했던 교사 5명과 승무원 등 숨진 여러 의인들, 그리고 꽃을 피우지도 못한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있으나 남 선생 얘기만 했다. 다른 뜻은 없다. 아픔을 이기는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자식을 잃은 슬픔을 승화하는 남 선생 부모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당시 보여준 희생정신, 직업윤리는 세월이 흘러도 퇴색돼서는 안될 사회적 자산이라는 걸 그의 부모는 세상에 전하고자 함일 것이다.
정진황 기획취재부장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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