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동네 공원에서 혼자 새벽 달리기를 하다가 그놈을 만났다. 신체 특정 부위를 난데없이, 수요 없이 노출하는 것에서 성적 쾌감을 느낀다는 일명 바바리맨. '바바리'가 아닌 체육복을 입은 그는 걷기 운동을 하는가 싶더니 그 부위를 다짜고짜 내보이며 징그럽게 웃었다. "반응하면 흥분하니 무시하라"는, 학창시절 학습한 변태 대처법에 따라 덜덜 떨리는 다리로 그저 계속 달렸다. 흉기를 든 그가 쫓아오는 상상이 홀로그램처럼 시야를 덮쳤지만 무서워서 돌아볼 수 없었다.
대신 온갖 위험을 감지하는 촉을 풀가동시켰다. 두 눈이 전방을 향한 채로 뒤를 보려 애썼고, 두 귀를 위성방송 접시 안테나처럼 넓게 펼쳐서 그의 발소리와 숨소리를 쫓았다. 초능력자라서가 아니다. 여자들을 자주 때리고 죽이는 세상에서 50년 가까이 살다 보니 그게 가능해졌다. 늦은 밤 택시에서, 낯선 사람과 단둘이 탄 엘리베이터에서, 인적 없는 공중화장실에서, 만원인 지하철에서, 이상스럽게 조용한 아파트 복도에서, 어둑한 골목길에서, 위험을 포착하려 뒤통수에서 눈이 떠지고 몸 여기저기서 더듬이가 돋아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많은 여성들이 알지 싶다.
바바리맨 사건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성별에 따라 갈렸다. "괜찮느냐"고 걱정해준 사람들과 "에이, 설마"라면서 믿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산다. 조금도 안전하지 않은 세계와 이만하면 안전한 세계. 무신경해지면 큰일나는 세계와 한껏 무신경해도 무탈한 세계. 성범죄자가 아무데서나 튀어나오는 세계와 그럴 리 없는 세계.
지난달 영국 BBC방송의 한 토크쇼에서 두 세계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들춰졌다. 출연자는 배우 덴젤 워싱턴, 에디 레드메인, 폴 메스칼, 그리고 유일한 여성인 시얼샤 로넌. 레드메인은 최근 암살범을 연기하며 휴대폰으로 적의 목을 가격해 위기를 벗어나는 기술을 연습한 이야기를 했다. 메스칼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공격 당하는데 휴대폰이나 찾는다고요? 대체 누가 그런 발상을 해요?" 로넌이 싸늘하게 말했다. "여자들이요. 여자들은 항상 그런 걸 궁리해야 하죠." 정적이 흘렀다. "내 말이 맞죠, 여성분들?" 로넌의 말에 관객들이 환호했다.
이 장면이 언론과 SNS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파된 건 휴대폰이라도 무기로 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실존하기 때문이다. 바바리맨에게서 도망칠 때 손도끼처럼 휘두를 작정을 하고 나도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다. 휴대폰을 본래 용도로 사용해 신고전화를 하겠다는 생각이 나중에서야 난 건 법과 제도는 멀고도 느리다는 경험적 지식이 작동해서였다.
그날 로넌의 일침에 남성 배우들은 입을 닫았다. 폭력적으로 반박하지도, 비겁하게 변명하지도 않았다. 며칠 전 메스칼은 다른 토크쇼에서 "로넌이 옳았다"고 했다. 여성들의 처지에 공감했거나, 말싸움으로 자존심을 챙기려 할수록 못나진다는 걸 알 만큼의 교양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어느 젊은 한국 남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전하고 싶다는 여성들의 호소를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라 부른 그, 성범죄의 잠재적 피해자보다 잠재적 가해자들에게 마음을 포갠 나머지 최근 국회를 통과한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지고도 당당한 그 국회의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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