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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입력
2015.04.1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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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낙조. 세월호 사고 1주년을 앞두고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 뒤로 해가 지고 있다 .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팽목항 낙조. 세월호 사고 1주년을 앞두고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 뒤로 해가 지고 있다 .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작년 가을 최경환 부총리와 술 한잔 할 기회가 있었다. 평소 즐겨 찾던 서울 명동의 술집으로 인도했다. 술집 주인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 부총리의 팬이라며 서비스 안주까지 내줬다. 그리고 “세월호 지겹다, 세월호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는 요지의 하소연을 했다. 더 심한 말도 했으나 생략한다. 최 부총리는 “이게 민심”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경기 부양의 의지도 다졌다. 나는 서비스 안주를 먹지 않았고, 이후 그 집에 다시 가지 않는다. 일종의 소극적 저항인데, 술집 주인 입장에선 손님 하나(후배들에게도 알렸으니 더 많을지도)를 잃은 셈이다.

술집 주인의 넋두리, 사실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당시 유족이 얽힌 대리기사 폭행 사건이 연일 대서특필되고, 경기가 좀체 살아나지 않는 이유가 세월호 참사 때문이라는 여론도 비등했다. 술집 주인은 그저 일부 언론에 실리는 내용에 자신의 처지를 덧대 피로감을 호소했을 게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맘은 이해하지만 시간도 지났으니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그이의 절박감을 면전에서 반박할 논리가 내겐 없었다.

아니 그보다 돈이 얽힌 논리 따위로 대거리하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세뇌에 빠져 이웃의 비극을 외면하는 그이의 삶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얼마 뒤 대통령은 국회에서 유가족을 외면했다. 정치인들의 비하 발언도 잇따랐다. 그렇게 비극을 짓눌렀지만 경기가 살아났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 모두에게 연민을 느낀다.

참사 1주기를 맞아 유가족들의 얘기가 부각되고, 슬픔을 되새기는 행사들이 잇따르면서 다시 “지겹다”는 얘기가 들린다. 나라 살림도 쪼들리는데 거액을 들여 굳이 인양을 해야 하냐는 현실론부터 보상금이 너무 많다는 비난까지, 다들 돈 타령이다. 우리는 돈보다 먼저 난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망각은 참사에 버금가는 이 사회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유가족의 바람은 근본적인 진상 규명이다. “유가족이라도 되게 해달라”는 실종자가족의 절규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 당연한 요구를 1년간 뒤틀고 뭉개고 지겹게 만든 장본인은 유가족이 아니라 무능하고 비정한 정부다. 여론에 떠밀리고 정략적 계산까지 더한 대통령 한마디에 득달같이 내놓은 인양 계획, 주객전도의 극치를 보여주는 특별법 시행령, 도의조차 저버린 보상금 발표는 지겨움을 유발하는 주범이 누구인지 확실히 증언한다.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 날로 인양 계획 발표를 앞당긴 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세월호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국가라는 탈을 쓴 기득권 세력의 ‘지겹게 하기’ 전략은 도처에서 목도할 수 있다. 그것의 목표는 분열 조장과 문제 해결의 외면이다. 연대와 연민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우리를 자본의 노예로 강등시킨다. 6년간 정리해고자와 그 가족 2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숨진 쌍용차, 7년 넘도록 할머니들의 절규가 그치지 않는 밀양 송전탑 사건을 보라. 노동자들의 고공 시위는 또 어떤가.

내 머리 위로는 고압 전류가 지나가지 않고, 정규직인데다 당장 해고당할 일이 없으며, 내 가족은 안전하다는 안도에 잠겨있다면, 그래서 당장 먹고 살기도 벅찬데 세월호가 지겹다면 너무나도 유명한 신학자 마르틴 나묄러의 시를 작금의 현실에 빗대 음미하길 권한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그들이 사민주의자들을 잡아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나는 방관했다/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는/항의할 수 있는/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엔 계엄군의 총탄에 맞은 아들을 둔 선생님이 있었다. 나는 이후 9년간 그를 ‘빨갱이 엄마’로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진상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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