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파동은 조세 불신의 폭발
내 지갑만 털린다는 박탈감 달래려면
법인세 소폭 인상으로 물꼬 터야
이미 거둔 세금을 되돌려 주는 초유의 소급입법으로 끝난 연말정산 파동을 지켜보면서 처음으로 조세저항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상에 세금 좋아할 사람은 없고, 어떤 세금이든 인상에는 크고 작은 반발이 따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 ‘통제범위 안의 저항’이었다. 하지만 이번 연말정산은 기왕의 반발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샐러리맨들이 화가 난 건 단지 세금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조세정책 자체에 대한 누적된 불신이었다.
사실 지난 1월 연말정산 과정에서 불거진 세금폭탄론은 좀 부풀려진 측면이 있었다. ‘피폭’계층으로 여겨졌던 연봉 5,500만원 이하 샐러리맨들의 정산내역을 정부가 일일이 계산해 보니 실 부담액은 늘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평균 3만원가량 감소했다. 반대로 세금을 더 내게 된 봉급생활자는 8명 중 1명꼴, 금액은 평균 8만원 정도였다. 누가 봐도 중산층 이하 봉급을 받는데 일부라도 세부담이 늘어나게 된 건 분명 잘못된 조세설계이지만, 그렇다 해도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려야 할 정도로 폭탄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정부는 우리나라 70년 조세정책사에 사상 첫 소급입법의 오점을 남기게 된 게 못내 억울할 것이다. 폭탄이 아닌 것을 폭탄이라 예단하고, 파동이 될 수 없는 걸 파동으로 몰고 간 SNS, 언론, 정치권을 조세저항촉발의 세 주범이라고 탓하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과정을 반추해 보면 세부담이 늘어난 일부의 불만이 SNS를 통해 확산됐고, 언론은 이를 기정사실로 대서 특필했으며, 재ㆍ보궐선거를 앞두고 놀란 정치권이 성급하게 세금반환 소급입법을 선택하게 된 건 어느 정도 맞는 얘기다.
하지만 진짜 조세저항과 가공된 조세저항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사실이든 왜곡이든, 부풀려진 것이든 아니든 대다수 국민들이 세금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게 곧 조세저항이다.
불신의 뿌리는 피해의식에서 나온다. 주변에 나보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나만 세금을 꼬박꼬박 내야 하는지, 몇 조원씩 버는 대기업 세금은 깎아 주면서 정부는 왜 전세금에 시름하고 학원비에 허덕이는 내 지갑만 계속 털어 가는지… . 사실 이런 박탈감이 그냥 생긴 건 아니다. 담뱃값을 두 배로 올린 이유가 알고 봤더니 국민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금을 더 걷기 위한 꼼수였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국제유가는 뚝뚝 떨어지는데 국내 휘발유 값은 잘 내리지 않는 이유를 정부는 주유소 폭리 탓으로 돌렸지만 알고 봤더니 꼼짝 않는 세금 탓이란 걸 확인하게 되면서, 서민ㆍ중산층들은 갈수록 속는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결국 거대한 조세저항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절대로 3만원, 8만원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연말정산 파동을 보면서 이제 증세는, 특히 서민ㆍ중산층이란 말이 앞에 붙는 순간 세금은 단돈 1원의 인상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세가 없다면 복지도 없다는 건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꼼수 인상은 불가능하고, 이제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다. 일단 법인세를 약간만 올리는 거다. 야당은 MB정부 시절 인하(25%→22%)된 법인세율을 환원시키자고 주장하지만 정책의 지속성과 국가간 조세경쟁, 기업부담을 고려할 때 3%포인트 인상은 쉽지 않아 보인다. 대신 딱 1%포인트만 올리면 어떨까 싶다. 세수증대 목적이 아니라, 박탈감에 뿔난 중산ㆍ서민층을 설득하려면 그나마 여유가 있는 대기업이 조금이나마 먼저 부담을 진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정도 세부담은 대기업들도 감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필요하다면 연 소득 3억원이든 5억원이든 소득세 고액구간을 신설해 최고세율(현재 1억5,000만원 이상 38%)도 올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 세금은 세수의 위기가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신뢰의 위기에 처해있다. 납세가 강탈로 여겨지는 신뢰붕괴 상황에서 국가는 절대로 지탱할 수 없다. 성완종리스트가 뭐든, 총리가 있든 없든, 정부와 국회는 더 이상 증세논의를 피해선 안 된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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