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의 깜짝 압승으로 끝난 영국의 최근 총선은 ‘두 개의 민족주의’가 판을 흔든 것으로 분석된다. 하나는 유럽연합(EU)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로 존립하고 싶다는 전체 영국민 차원의 ‘대(大)민족주의’, 다른 하나는 영연방에서 독립하겠다는 스코틀랜드 유권자들의 ‘소(小)민족주의’다. 하지만 영국 총선에서 정작 관심을 끄는 대목은 현지의 복잡한 민족감정이 아니다. 경제정책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아젠다 경쟁, 그리고 진보의 예사롭지 않은 패배다.
민족주의와 함께 보수당이 이번 총선에서 내세운 또 하나의 아젠다는 경제였다. 집권 초기인 2011년 1.6%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지난해 2.6%에 이르고, 실업률도 같은 기간 8.06%에서 6.33%로 하락할 정도로 경제를 살렸다는 점을 집중 부각했다. 재정적자를 반이나 줄인 실적이 곁들여졌음은 물론이다. 요컨대 EU경제 전반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나라살림을 견실하게 꾸리고 돈벌이에도 성공했다는 점을 선전한 것이다.
반면 노동당은 분배강화에 초점을 둔 정통 좌파 아젠다로 승부수를 걸었다. 부자 소득세(최고세율)를 45%에서 50%로 올려 재정적자를 메우겠다고 했다. 노동자 2,400만 명에 대한 감세, 대학등록금 매년 6,000파운드 감면, 최저임금 추가 인상 등의 공약이 줄줄이 나왔다. 재정개혁이나 경제활성화 대책엔 무심했다. ‘나눔과 보살핌의 공약’으로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노린 포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고, 최소한 약자에 대한 연민과 보호만으로는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노동당이 이번에 정통 좌파노선을 고수한 건 토니 블레어 전 총리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블레어 전 총리는 분배강화와 복지확대 같은 좌파 노선에서 벗어난 ‘제3의 길’을 노동당의 모토로 내세우며 2007년 총선에서 압승했다. 하지만 이번에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는 블레어가 불평등 문제를 간과했다며 정통 좌파노선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것이다.
주목되는 건 참패 후 나온 블레어 전 총리의 충고다. 그는 일간지 가디언 기고를 통해 “노동당이 정권을 탈환할 수 있는 방법은 중도성향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내놓고 공공서비스 개혁을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친(親)기업론을 제시했다. 물론 블레어의 친기업론은 마르크스 식의 대립구도 속에서 자본가의 착취를 지지하자는 게 아니다.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기업을 지원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돕는 대안정책을 내야 한다는 얘기다.
영국 노동당의 오늘을 보면서 우리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정책적으로는 분배강화와 보편적 복지라는 유럽 좌파노선을 충실히 따라왔던 새정치연합도 결국 지난 재보선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수많은 원인 중에서도 필자가 주목하는 건 국민들도 이젠 대책 없는 포퓰리즘에 염증과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불평등 해소가 당면 시대정신인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건 오늘의 정치가 풀어내야 할 기본 의제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에 눌리고, 중국의 추격에 숨 가뿐 우리의 경제 현실 속에서 기업을 살리고 새 성장동력을 발굴해내는 대안을 새정치연합이 두드러지게 제시해본 적이 있는지를 생각하면 착잡할 뿐이다.
왜 새정치연합은 국가적 과제인 공무원연금이나 공공개혁에서는 뒷걸음질만 치는지, 왜 일자리를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정작 위기에 빠진 조선, 해운, 철강, 유화 등 핵심 중공업을 되살릴 방안 같은 걸 내놓지 못하는지, 왜 나랏돈을 쓸 생각만 하고 더 벌 생각은 안 하는 건지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블레어 전 총리의 충고에 기댈 것도 없이, 새정치연합도 앞으론 경제를 살려 번영을 일구겠다는 뚜렷한 대안을 내야 한다. 국민은 ‘착한 정치’ 못지 않게 유능한 정치를 원하기 때문이다. 눈치만 보며 시비만 거는 구태로는 20%대로 추락한 지금의 지지율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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