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행복한 한가위 보내세요.’
길거리에 현수막이 붙었다. 가족과 함께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만 명절 증후군은 왜 생겼겠나. 현수막 문구에 생략된 표현을 보자면 ‘가족과 함께(지만) 행복한 한가위’ 되시라는 게 아닐까 싶다. 지난해 추석 연휴 때 트위터에 올라온 추석 관련 글 12만5000건을 분석해보니, 연관어 2위가 ‘스트레스’, 3위가 ‘힘들다’, 4위가 ‘울다’였다고 한다. 이어서 붙여보면 추석 ‘스트레스’로 ‘힘들다.’ ‘울 것 같다’ 이렇게 되겠다.
그래도 추석 관련 연관어 1위는 ‘즐겁다’였다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내가 즐거운’이 아니라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라’는 덕담 인사 속에 들어있는 키워드였다. 즐거우시라는 덕담은 남에게 하는 소리고, 스트레스, 힘들다, 울다, 역겹다 같은 연관어는 본인들 바로 옆에 있는 가족에게 느낀 것이다.
이렇게 명절에 속 끓는 한국인들에게, 속풀이 하라고 캠페인이 생겼다. 트위터 코리아가 진행하는 ‘#매너가_추석을_만든다’ 캠페인. 트위터에 추석 천태만상을 고자질하라는 건데, 해시태그 ‘#매너가_추석을_만든다’를 붙이고 글을 쓰면 된다. 큰아빠에게 대놓고 “매너가 추석을 만듭니다!”라고 외칠 수는 없으니까. 아마 큰아빠는 이렇게 대꾸할 거다. “우리가 남이가!?”
매너는 남에게나 지키는 것. 이런 생각이 뿌리 깊다. 위계가 있는 곳에선 윗사람에게 깍듯한 것은 물론이요, 아랫사람에게 하대하는 것 또한 예의범절이다. 아랫사람에게 매너를 지키는 것은 ‘남에게나 하는 짓’이다. 일 년에 한 두 번 보는 친척끼리 남이 아닌 척(!) 묶어두기가 이렇게나 힘들다. “막내 이모네 둘째딸 이름이 뭐니?” 물은 뒤에 “그래. 대학은 어딘데? 일단 취업 하려면 어디든 들어가야지.”하고 훈수를 두려니 얼마나 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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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몇 가지 고자질을 좀 해야겠다. 고자질이라기 보단 사실 ‘매너 없는 추석’에 대한 관찰기에 가깝겠다. 추석 때, 어르신들 모여서 이야기하는 걸 듣다 보면 나는 동화 ‘어린왕자’가 떠오른다. 어린왕자는 빨간 벽돌로 지은, 장미가 핀 집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런 말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 집이 1억인지 10억인지 숫자로 말해야만 이 집의 아름다움을 가늠할 수 있다. 어린왕자는 노란 머리지만 어린왕자 속 어른들은 검은 머리 한국 사람이었나 보다. 추석날 대화는 집값과 연봉과 차 견적 같은 ‘숫자’ 이야기로 귀결된다. 이런 상황일진데 거기에 재산싸움까지 얽히면 답이 없다. 명절마다 단골인 8시 뉴스가 있지 않던가. ‘재산 싸움 하다...가족끼리 명절 칼부림.’
또 하나. 연봉이나 차 견적만이 아니다. 추석날, 서로의 스펙을 따지는데 자식의 값어치도 한 몫 한다. 자식도 하나의 소유물인 셈이다. ‘둘째네 딸은 이번에 서울대를 갔네, 넷째네 아들은 이번에 대기업을 갔네.’ 어릴 때 친했던 동갑내기 사촌과는 크면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나와 그 친구는 성적을 두고 명절 때마다 비교를 당했다. 반복되는 비교에 한 사람은 기가 죽고 한 사람은 머쓱하니, 점점 할 말이 없어졌다. 부모 세대는 한 집에서 여섯 형제가 부대끼고 살았다지만, 우리는 형제도 몇 없는 사정에 사촌끼리도 명절에 비교 당하고 마음 상하고 멀어지는 것이다. 뭐가 가족과 함께하는 대명절인가.
가족이란 이름이 서로 막 대해도 괜찮다는 면죄부는 아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 하대하고, 여자들은 일하느라 분주하고 남자들은 고스톱 치는 광경을 보면 가슴이 꽉꽉 막혀온다. 몇 번 지내보니, ‘나 홀로 추석’도 나쁘지 않다. 도심도 많이 비었고, 볼 영화도 많다. 사정이 되는 사람이나 할 얘기지만 말이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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