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가 등수에 따라 장학금을 주는 '성적 장학금'을 폐지하겠다고 한다(▶ 관련기사). 성적 잘 받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장학금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고려대학교의 전체 장학금 규모는 내년 359억원이 될 예정이다. 원래 고려대에서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을 위한 '보상'의 성격으로 연간 27억~28억 정도를 성적 장학금에 할당했었는데, 내년을 마지막으로 성적 장학금을 없앤다. 대신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추가로 지급하고, 교내 근로를 통해 돈을 버는 근로장학생의 시급을 인상한다. 소득 재분배를 위한 장학금. 참 좋은 생각이라는 목소리가 많은데 한편에선 볼멘소리가 나온다. 취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기 신세에 대한 '박탈감'을 표현하는 부분이 더 크다. '성적 장학금'만이 희망이었던 대학생들이 있어서다.
"성적 장학금은 그대로 두고, 저소득층 장학금을 늘려야 하는 것 아니냐."
"취지는 좋은데 나는 성적 장학금 말고는 받을 수 있는 게 없다."
성적 장학금에 이렇게 목매는 사람들은 '끼인 계층'이다. 정부의 '소득 연계형 국가장학금' 정책에 더해 학교 장학금마저 '소득에 따라' 주는 방식이 되면 이 '끼인 계층'은 이것도 못 받고 저것도 못 받는다. 애매하게 가난한 위치. 대학 등록금도 애매하게 비싸면 좋으련만 확실하게 비싼 게 문제다. 애매하게 가난한 사람은 자꾸 가난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탈락한다. 그리고 대출 받아서 비슷한 수준으로 가난해진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사실 등록금 부담 자체가 줄었다면 이런 소리가 나올 리 없다. 반값 등록금이다 뭐다 아직도 선거구호가 귀에 쟁쟁한데, 대학생과 가계의 체감 부담은 별로 줄지를 않았다. '요즘은 국가 장학금도 다 주고 반값 등록금이 거의 다 실현 됐다는데 이게 무슨 소리래?'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정부는 올해 초 '반값 등록금이 완성되었다'고 발표했다. 반값 등록금이 완성되었다고 체감하는 대학생, 학부모는 얼마나 될까? 많지 않다.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대학교육연구소와 함께 분석한 ‘반값등록금 시행 방안 연구’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국가 장학금의 수혜자 수가 대학생 절반에 못 미친다. 둘째. 최대로 줄 수 있는 국가장학금 액수가 실제 등록금보다 적다. 셋째. 국립대와 사립대의 등록금 차이가 크다. (▶ 관련 기사)
2013년 1학기 국가장학금 수혜자는 전체 232만명 중 42%. 97만명이다. 국가장학금 수혜자 비율은 대체로 2014년 1,2학기를 포함해 40% 초반대에 머물렀다. 못 받은 사람이 반절보다 많다. 교육부에 따르면 기초~2분위까지는 등록금이 100%, 3분위 86%, 4분위 63%, 5분위 40%, 6분위 29%, 7분위 16% 경감 된다 . 반값 등록금 효과를 보는 사람은 기초~2분위,3분위,4분위까지다. 그런데 진짜 ‘내 등록금’의 반값인 것도 아니다. 국가 장학금은 연 480만원까지 상한선이 묶여있는데, 사립대는 인문사회계열 평균 연 640만원, 의학계열은 1,000만원 선의 등록금을 내야한다. 국가 장학금은 50% 받아도 ‘내 등록금’의 50%는 아닐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은 올해 평균 667만 원으로 전 세계 2위다. 대학진학률은 세계 1위(71%). 많은 가계가 대학 등록금의 부담에 허덕인다. 올해 중위소득은 422만2천533만원 (4인 가구 기준)이다. 중간 계층도 애 하나 대학 보내는 게 수월한 일이 아닌데 계층별로 따져 깎아준다고 공정한 분배일까? ‘미친 등록금’은 그대로 두고. ‘부담 가능한 수준’이 아닌데, 계층별로 따져서 깎아준다. 백화점 블랙 프라이데이 같다. ‘667만 원짜리 스카프를 오늘만 30% 세일해 드립니다!’ 깎아줘도 비싸서 못 산다. 그런 심정이다.
‘빚 질 여력’이 있는 사람은 빚지고 살자는 정책 같다. 이미 다들 ‘빚 부자’인데? 올 6월말 기준 한국장학재단 학자금 대출 연체율(1.6%)은 은행 가계대출 연체율(0.42%)의 3.8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2013년 학자금 대출 경험이 있는 대졸자의 1인당 평균 채무액은 1,465만원이다. 이들 중 30% 이상이 상환 과정에서 원리금을 제때 못 냈다. 이 채무자 청년들은 소득 몇 분위일까. 2012년에 국가장학금은 얼마나 지원 받았을까. ‘이미 반값등록금이 완성됐다’고 말하는 정책집행자는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여력 있는 사람이 돕고 도움 받은 사람이 사회에 베풀고. 공정한 분배가 있는 사회는 좋은 사회다. 소득에 따라 장학금을 주자는 고려대의 사례는 좋은 제안이다. 그런데 왜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등록금 자체가 수렁이라서 그렇다. 교육부는 올해로 반값등록금이 완성됐다는데 체감으론 꼼수 같다. 누굴 먼저 건져줄 건지 번호표를 줄 게 아니라 수렁에 같이 모래를 채워서 수렁을 없애는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칼럼니스트
썸머 '어슬렁, 청춘' ▶ 시리즈 모아보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