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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조화 아닌 불협화음” 민주주의 핵심 꿰뚫다

입력
2015.11.06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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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셸던 월린 (1922. 8. 4 ~ 2015. 10. 21)

셸던 월린은 여론조사와 정세 전망, 관료주의적 통치 기술로 왜소해져 가던 60년대 영미정치과학의 시대에 권력, 체제, 지배,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철학의 자리를 지키고 키워 온 학자였다. 그는 2차대전 이후의 미국 사회를 ‘전도된 전체주의’로 규정했고, 질식해가는 자유민주주의의 실상을 쉼 없이 고발했다. 그의 역작 ‘정치와 비전’은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정치사상사이자, 장중한 민주주의 부활의 선언이다. 프린스턴대 자료사진
셸던 월린은 여론조사와 정세 전망, 관료주의적 통치 기술로 왜소해져 가던 60년대 영미정치과학의 시대에 권력, 체제, 지배,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철학의 자리를 지키고 키워 온 학자였다. 그는 2차대전 이후의 미국 사회를 ‘전도된 전체주의’로 규정했고, 질식해가는 자유민주주의의 실상을 쉼 없이 고발했다. 그의 역작 ‘정치와 비전’은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정치사상사이자, 장중한 민주주의 부활의 선언이다. 프린스턴대 자료사진

정치에 가치를 되돌려 놓다

계량ㆍ분석 치중하는 행태주의

1950년대 중반 영미학계 주류로

역작 ‘정치와 비전’ 통해 반박

사회사상사 첫 수업 주제는 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였다. 교수는 ‘M₂F’라는 낯선 원소기호를 칠판에 쓴 뒤 강의를 시작했다. 수소분자 둘과 산소분자 하나가 결합해 물(H₂O)이 되듯이, 두 남자(Male)와 한 여자(Female)를 한 방에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과학적으로’설명하고 예측하고자 했던 인식론적 관점과 과학철학이 실증주의라고 교수는 ‘쉽게’ 설명했다. 물론 웃자고 한 말이었겠지만, 실은 무섭기도 한 말이었다. 19세기 계몽주의의 끝이 그렇게 오만하고 자신만만했다.

실증주의는 절대성이나 초월성 같은 종교와 형이상학의 오랜 미몽에서 학문을 깨우는 데 기여했다. 심오한 사상의 자리에 경험적 관찰로 ‘입증’된 해석과 지침이 들어섰고, 논리적 분석을 통한 검증ㆍ반증이 원론적으로 가능해졌다. 수학 언어 기호가 중시됐고, 무엇보다 사회조사와 통계 등 방법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세기 이후 실증주의는 과학적 경험주의와 논리실증주의 기호논리학 분석철학 등으로 분화하며 진화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영미학계의 주류로 자리잡은 행태주의(Behavioralism)도 그 중 하나였다. 행태주의는 국가보다 개인ㆍ소집단을 연구 중심에 두고, 사상 등 선험적 가치(value) 대신 자극-반응 등 관찰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사실(fact)을 분석해 인간 사회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개념틀과 분석법을 마련하는 데 치중했다. 영미학계, 특히 실용주의적 전통의 미국 학계가 행태주의에 반색한 건 자연스러웠다. 계량ㆍ분석의 정치과학의 시대에 가치적 명제를 다루는 전통의 정치철학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버클리대학의 젊은 정치학자 셸던 월린(Sheldon Wolin, 1922~2015)이 역작 ‘정치와 비전’(강정인 등 옮김, 전3권, 후마니타스)을 출간한 게 그‘행태주의 혁명’의 기대로 뜨겁던 1960년이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저술의 짧은 서문 첫 단락에 그는 이렇게 썼다. “오늘날 많은 지식인 집단 사이에는 전통적인 형태의 정치철학에 관해 강한 적대감, 심지어 경멸감마저 존재하고 있다. 내 희망은 이 책이 비록 정치철학 전통에 그나마 남아있는 것을 기꺼이 내던지고자 하는 자들을 제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내버리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행동 동기 양상 계량 같은 낱말들의 쓰나미 속에서 권력 체제 지배 저항…, 무엇보다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지키고, 또 강단과 거리에서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저 말을 생동감 있게 쓰고 고민하게 하는 데 온 생을 바쳤다. 셸던 월린이 10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 1권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 1권

‘정치와 비전’은 플라톤에서부터 고대 로마와 중세, 근대 계몽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에 이르는 정치사상의 역사를 비평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1권 역자 후기에 실린 프린스턴대 출판부의 2004년 증보판 소개문 일부다. “(월린은) 정치사상가란 (현실의 객관적 관찰과) 동시에 창조적인 비전에도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월린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기존의 정치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선(또는 좋음)에 대한 모종의 비전에 따라 정치를 조형하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 추동되어 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사상사란 선에 대한 가정(假定)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월린이 겨눈 비평의 과녁은 그러므로 정치사상에서 ‘가치’가 소거돼온 궤적, 창조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의 자리를 경제학과 사회학, 심리학이 잠식해가는 맥락이었다. 예컨대 그에게 자유주의는, 권위의 자리에 국가 대신 사회를 앉힘으로써 자유를 사회의 통제에 맡겨버린 사상이었다. “19세기 정치사상의 출발점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마련했던 국가와 사회의 대립, 즉 제도 권위 및 사람들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관계와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유형의 관계 사이의 대립이었”고, “거의 모든 중요한 사상가들은 정치적인 것의 폐지를 천명”(2권 345쪽)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주의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을 소규모 자급자족적인 공동체에서 발견”했고 “토크빌은 다양한 지역 자치정부 체계를 유지하고 자발적 결사체들의 성장을 고무”(2권 349쪽)함으로써 과잉 중앙 집중화된 국가로부터 개인의 피난처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셸린은 자유주의가 국가 즉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핵심을 외면함으로써 오히려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고, 시민권과 의무 일반적 권위와 같은 관념과 실천 전반을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국가 권력에 대한 불신으로 사회로 퇴각했지만, 거긴 정치 질서 대한 사회의 조직적 질서들이 장악한 공간이었다. 조직적 질서란 “아무런 유기체적 관계도 없이 점점이 산재해 있는 사회, 단지 새로운 조직의 정치가들이 외교와 협상을 벌이는 장일 뿐인 사회”다. 셸린은 조직화ㆍ관료화한 기업과 학교(대학) 등 작은 사회들이(또 개인들이) 저마다의 이해를 위해 각축하는 섬들의 세상 너머 민주주의적 공동체가 합의한 집단적 가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통합 정치의 장을 지키고자 했다. 그에게 ‘정치적인 것’은 공동체적인 것, 역자인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사실상 동의어였다. ‘정치’와 ‘비전’은, 그로선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이었고, ‘슈퍼파워’같은 말과 민주주의와 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억압된 미 사회 분위기서 성장

1922년생… 반유대주의 경험

메카시즘 시기 버클리대 임용 후

자유발언운동 참여했다 쫓겨나

셸던 월린은 1922년 8월 4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 주 버팔로 시에서 성장했다. 80년대 초 정치학자 닉 제노스(Nick Xenos)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20~30년대 청소년기에 겪은 반유대주의 기억과 청년기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한다.(그의 제자로 ‘보수주의자들은 왜?’를 쓴 코리 로빈 뉴욕시립대 교수 트위터 인용) 그는 오벌린 대학을 거쳐 1950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빈은 “학부시절 그의 교수 중 상당수가 나치를 피해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피난 왔거나 이민 온 이들이었고, 월린의 정치적 감수성(요컨대‘정치적인 것’에 대한)은 그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썼다.

학부 시절 그는 미 공군 B-24 폭격수ㆍ조종사로 2차대전 남태평양 전선에 참전, 51차례 작전에 나섰다. 2014년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와의 인터뷰에서 월린은 “과달카날 전투 무렵부터 작전에 투입됐는데, 우리 임무는 해병대 상륙 전 일본군 기지에 폭격을 가하는 거였다. 일본 해군 함대를 상대하는 작전이 특히 악몽이었는데 저공비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참혹한 피해를 입곤 했다”고 말했다. 그 경험이 훗날의 ‘슈퍼파워’ 미국을 분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시 나는 19살이었고, 전우들도 많아야 23,24세였다. 우리는 미숙했고 분위기에 취약했다. 아주 힘겨운 시기였지만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구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억압된 기억들이 두고두고 어떤 의미로 떠오르고 내면적 성찰의 시기를 겪게 한 것은 맞다”고 말했다.

제대 후 복학해서 졸업하느라 바빴던 일, 학위를 따고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안간힘 쓰던 일, 특히 뭔가를 출판하는 일이 교수 자리를 얻는 데 유리해서 끊임없이 쓰고, 쓰고, 또 썼던 일…. 하지만 가장 힘든 건 그 시절 자체였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던 50년대, 이른바 메카시즘의 시대는 미국 대학들의 교수 사상 검열이 극렬했던 시기였다. 역사학자 스토턴 린드(Staughton Lynd,평화ㆍ인권운동가)가 예일대에서 쫓겨나는 등 숱한 교수들이 그 무렵 줄줄이 해직당했다.

그는 1954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교수가 됐다. 그의 자리 역시 한 교수가 충성서약을 거부해서 쫓겨나는 바람에 생긴 거였고, 그는 임용된 뒤에 그 사실을 알고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내게는 충성서약 요구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맹세를 군대에서 아주, 아주, 많이 해서였다.” 당시의 억압에 대해 그는 “최악인 것은, 일단 그런 기운에 젖어 들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게 정상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정책과 지배적인 가치에 대해 어디까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진다. 교수 자리 자체가 너무 적어서 일을 삼키기 위해서는 말을 삼켜야 했다.” 그는 64년 버클리대 자유발언운동(Free Speech Movementㆍ학내 표현의 자유를 위한 집회ㆍ시위로 캠퍼스 본관을 점거한 사건으로, 700여 명이 연행돼 578명이 기소된, 60년대 미국 최초의 대규모 학생운동)에 가담한 드문 교수 중 한 명이었다. 71년 가을 버클리를 떠난 건 사실상 쫓겨난 거였다고 알려져 있다.

냉전 시기였다. 억압은 73년 그가 프린스턴대로 옮긴 뒤로도 대학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무렵 프린스턴대 재단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을 지원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촉구하는 교수 결의안에 서명한 이는 500여 명의 교수 중 월린을 포함해 고작 4명에 불과했다. “그 운동을 주도한 학부생 대표가 학교 재정운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동창위원회에 불려가면서 나더러 함께 가달라고 하더라. 거기서 내 생전 그렇게 지독한 조롱은 처음 겪었다. 그들은 나를 ‘50살짜리 2학년생’이라고 부르더라.”

‘전도된 전체주의’ 개념 제시

시민의 탈정치화 유도하는 사회

나치즘과 방향 다르나 본질 유사

민중의 각성된 저항서 희망 찾아

그는 자본과 관료집단이 교수 임용과 커리큘럼에까지 개입하는 상황들을 뼈저리게 겪었고, ‘정치와 비전’을 낸 지 40여 년이 지난 2004년 증보판(3권)에서 근대 이후의 정치사상사와 더불어 슈퍼파워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현실, 즉 사적 권력과 공적 권력의 결합 양상을 분석하는 데 활용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인간사에서 가장 고도로 권력이 집중된 것으로 널리 인정된 체제에 맞서, 거의 반세기 동안 준동원 상태에서 ‘총체적 전쟁(냉전)’을 수행하면서도, 그 자체가 심대한 변화, 심지어 체제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 가능한 일인가?”(3권 증보판 서문) 월린은 미국 사회를 나치즘과 대조되는 “그러나 반드시 대립적이지 않은” 경향들의 조합 곧,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ism)’라 규정했다.

“나치즘과 전도된 전체주의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나치즘이 시민들을 동원하는 체제라면, 전도된 전체주의는 이전에 있었던 민주화의 경험에 겉치레의 찬사를 보내면서 시민들을 탈정치화 한다는 점이다. 나치가 대중에게 집합적인 힘에 대한 의식과 자신감, 또는 ‘기쁨을 통해 느끼는 힘’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던 반면,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는 나약함의 느낌, 곧 민주적 신뢰의 부식, 정치적 무관심, 자아의 사사화(私事化)에서 정점에 이르는 집단적 무력감을 촉진시킨다. 나치가 불평불만 없이 지배자를 지지하고 잘 관리된 국민투표에서 열광적으로 ‘찬성표’를 던지는 지속적으로 동원되는 사회를 원했다면, 전도된 전체주의의 엘리트는 좀처럼 투표에 나서지 않는 정치적으로 탈동원된 사회를 원한다. 그 형태는 2001년 9월 11일의 끔찍한 사건 직후 부시 대통령에 의해 윤곽이 드러났다.”(3권, 367쪽)

인터뷰에서 그는 조직화ㆍ관료화를 통해 관리되는 민주주의, 기업ㆍ국가 권력이 결합한 전도된 전체주의의 기만성을 스노든의 폭로와 ‘스파이법(Espionage act)의 오용 사태에 빗대 말하기도 했다.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중이 감시하고 각성하는 게 엄청나게 힘들어진 시대다. 어떤 사안에 대해 발언하고 투표한다고 해서, 대중이 그들의 생각처럼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행위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도된 전체주의 체제를 균열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그가 든 것은 ‘탈주적(fugitive) 민주주의’라는 거였다. 민중(demos)의 각성된 저항, 국가의 기획과 제도 바깥에서 일어나는 즉흥적이고 일회적이고 덧없기까지 한 역사의 계기들. 이를테면 1960년대 미국 신좌파 사회운동이나 30년대 최저임금 보장요구로 뜨거웠던 사회운동기, 2012년의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슈퍼 파워의 손아귀에 질식해가는 민주주의를 저 소박한(?) 대안으로 되살릴 수 있을까 싶지만, 민주주의가 정태적인 제도나 체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의사를 확인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구현되듯, 그는 ‘정치적인 것’을 되살리기 위한 작은 운동과 실천들 속에서 가녀린 희망을 보고자 했다. 80년대 초 5년간 아르노 메이어(Arno Mayer, 1926~)와 더불어 좌파 정치 학술지 ‘Democracy’를 출간하고 뉴욕타임스 북리뷰와 칼럼 등을 통해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끊임없이 고발한 것도, 더 앞서 60년대 버클리의 젊은 대학생들과 어깨 겯고 70년대 프린스턴 관료주의의 모욕에 의연히 맞선 것도 그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정치와 비전’ 3권 마지막 장 마지막 단락을 그는 이렇게 맺었다. “이 시점에서 핵심적인 도전은 조화를 이루어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조화를 조성하는 데 있다. 즉 어떻게 민주주의가 총체성에 정당성을 제공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민주주의를 육성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파시즘의 시대에 그람시는 핵심적인 과제가 ‘(이탈리아)민족의 시민적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슈퍼파워의 시대에 그 과제는 사회의 시민적 양심을 육성하는 것이다.”

책을 번역해 낸 후마니타스 출판사는 그의 부고에서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학자”라고 소개했다. 그가 독창적이라면 시류에 맞서 정치(철)학의 본령을 우직하게 지켜낸 고전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독창성이었다. 그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학자라는 건 희망으로 버무린 평가인 듯하다.(메이저 언론사 가운데 그의 부고를 쓴 곳은 뉴욕타임스-그나마 밋밋한-가 유일했다.) 그는 여러 좋은 글을 썼고 버클리학파라 불리는 여러 좋은 학자들을 제자로 두었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정치철학의 자리, 민주주의의 자리가 썩 안전해 보이지는 않는다. 시민이 함께 지키고 넓혀야 할 자리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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