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브로크(Alice Brock, 1941.2.28~2024.11.21)
올드팝 팬에게 ‘앨리스(Alice)’는 영국 록밴드 스모키(Smokie)의 1976년 리메이크 곡 ‘옆집 살던 앨리스’(Living next door to Alice)가 유명하지만, 포크 음악이 제 이름(folk)처럼 서민의 계급 정서를 대변해주던 시절을 애틋하게 기억하는 이라면 알로 거스리(Arlo Guthrie, 1947~)의 67년 노래 ‘앨리스 레스토랑(Alice Restaurant Massacree)’의 앨리스를 떠올릴지 모른다. 전자의 앨리스가 짝사랑으로 끝난 알알한 첫사랑의 추상이라면, 후자의 앨리스(의 식당)는 60년대 청년들의 영혼의 허기를 달래준 구원과 안식(처)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엄연한 실존 인물이었다. '앨리스 레스토랑'의 앨리스 M. 브로크(Alice May Brock, 1941.2.28~2024.11.21)가 별세했다. 향년 83세.
노래 제목의 ‘매서커(massacree)’는 미국 중부 오자크(Ozark) 고원 지역 서민들의 구어체 방언으로, 표준어 ‘massacre(대학살, 대참변)’의 섬뜩한 뉘앙스를 희석해 “믿기지 않을 만큼 터무니없고 복잡하게 얽힌 흔치 않은 일련의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사건이 추수감사절 하루 전인 1965년 11월 24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톡브리지(Stockbridge)에서, 학교 사서 앨리스의 신혼집에 제자 두 명이 놀러오면서 시작됐다. 18세의 알로 거스리와 친구 릭 로빈스(Rick Robbins, 당시 19세). 고교를 갓 졸업한 해방감에 들뜬 둘이 낡은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몰고 북동부 일대를 떠돌다 막 돌아온 길이었다. 거스리에겐 그리 멀지 않은 뉴욕 브루클린에 가족이 있었지만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대공황시대부터 활동한 좌파 싱어송라이터 겸 포크음악의 대부 우디 거스리(1912~1967)의 장남. 우디는 50년대 헌팅턴 무도병이 발병하면서 궁핍함 속에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 그 무렵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었다.
앨리스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느라 분주한 사이 멀뚱히 앉아 있기 미안했던 둘은 거실 한편에 쌓인 폐가구 등 쓰레기를 치워주겠다고 자청했다. 하지만, 차에 쓰레기를 옮겨 싣고 나오긴 했는데 하필 휴일이라 마을 쓰레기장 문이 닫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후미진 한 사유지 빈터에 쓰레기를 몽땅 부린 뒤 의기양양 귀가했다.
다음 날 아침 경찰관이 찾아왔다. 쓰레기 무단투기 신고를 받고 더미를 뒤져 출처를 찾아낸 거였다. 장발 ‘히피’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작정한 경찰관은 수갑까지 채워 그들을 연행한 뒤 유치장에 수감했다. 가난한 앨리스는 “추수감사절 만찬은 결코 망칠 수 없어”라며 서랍 속 외국 동전까지 긁어모아 보석금 50달러(각 25달러)를 내고 둘을 데려왔다. 그렇게 그들은 추수감사절 만찬을 즐겼고, 알로와 앨리스는 식탁에 앉아 장난치듯 기타를 치며 저 노래 1절 가사(쓰레기 소동)를 썼다.
그렇게 멈춘 듯하던 이야기는 얼마 뒤 알로에게 베트남전쟁 징집 영장이 나오면서 다시 서사의 기울기를 얻게 된다. 입대하는 게 너무 싫었던 알로는 ‘정신 이상’ 진단이라도 받으려나 하는 마음에 술도 덜 깬 채 뉴욕 징병사무소에 출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징병관은 신원조회에서 알로의 쓰레기 무단투기 ‘전과’를 찾아내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그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한 행운을 알로는 2절 가사로 썼다. “당신들(국가)은 내가 쓰레기 무단투기 전과자여서, 전쟁터에서 (베트남) 여성과 아이들, 집과 마을을 불태울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일지 의심하네.”
경찰이 자술서에다 참고인 진술서, 증거사진까지 첨부해 영장을 준비했지만 약식재판 판사는 맹인 안내견과 함께 온 시각장애인이어서 하나도 들춰보지 않더라는 이야기 등 경찰과 군대, 권위주의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내용의 가사를 통기타 반주에 맞춰 주절주절 이야기하다 후렴만 가락에 얹은, 장장 18분 20초에 달하는 그 만담풍의 노래를 알로는 67년 7월 로드아일랜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처음 불렀고, 그해 10월 자신의 데뷔 앨범 ‘Alice’s Restaurant’ 타이틀곡으로 수록했다. 노래는 60년대 대표적인 반전 가요로, 또 힘든 시절 추수감사절의 향수와 온기를 북돋우는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다.
후렴구 가사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철길을 따라 반 마일쯤 가다가/ 뒷길로 접어들면 한 모퉁이에/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주문할 수 있는 앨리스 레스토랑이 있지/ 앨리스 레스토랑에선 원하는 건 뭐든 먹을 수 있어.” 부조리한 세상에서 떨려난 모두를 환대하는 존재와 공간. 앨리스와 그의 식당은 60년대 유토피아의 한 상징이었다.
앨리스 브로크는 1941년 인쇄업자 아버지와 부동산업자 어머니의 딸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매사추세츠주 프로빈스타운에서 현지 화가들의 팸플릿 등을 제작해주던 아버지 덕에 앨리스는 매년 여름을 케이프코드 바닷가에서 보냈다고 한다. “속옷만 입고 행복하게 놀던 추억이 내겐 무척 많다. (…) 열두 살 전까지 수영복을 입은 기억이 없지만 거기선 늘 그랬다.”
완고한 아버지와 불화하며 반항적인 10대로 성장한 그는 잦은 말썽으로 청소년 교화시설을 들락거렸고, 뉴욕 브롱크스의 한 대학(Sarah Lawrence College)에 진학해서도 채 2년을 못 다녔다. 학생회 단체에 가입해 “썩 환영받지 못하던 정치적 대의(아마도 반전운동)"에 몰두한 탓이었다. 그는 60년대 반체제 문화운동의 거점이던 그리니치빌리지로 이주, 건축가 겸 목수였던 남자(Ray Brock)를 만나 1962년 결혼했다.
“잭 케루악과 비트세대의 세례를 입은 창의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던” 부부는 스톡브리지로 이주, 문 닫은 성공회 교회 건물을 수리해 기거하며 인근 기숙사학교 스톡브리지 고교에서 각각 사서와 임시 미술교사로 일했다. 그들의 집은 이내 학생-청년들의 “기이하고도 따듯한 모임 공간”이 됐다. “늘 기타를 짊어지고 다니던 웃기게 생긴 녀석(알로 거스리)”도 모임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주민에게 그들은 성스러운 교회를 “툭하면 모여 마약이나 일삼 는(…) 히피와 비트족들의 코뮌(beatnik commune)”으로 타락시킨 몹쓸 것들이었다.
경찰관 빌 오번하인(Bill Obanhein)이 휴일 아침에 쓰레기 더미를 일일이 뒤져 편지봉투를 찾아낸 것도, 훈방이면 끝날 일을 두고 수갑까지 채워 연행한 까닭도 그래서였다. “히피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던 노랫말 속 ‘오비 경관(Officer Obie, 1994년 작고)’은 훗날 스톡브리지 경찰서장을 지냈고 알로 등과 친구가 됐다.
노래가 큰 인기를 끌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의 영화감독 아서 펜(Arthur Penn)이 영화 ‘앨리스 레스토랑’을 제작, 68년 여름 ‘우드스톡 페스티벌’ 일주일 뒤 개봉했다. 패트리샤 퀸(Patricia Quinn)이 앨리스 역을 맡은 그 영화에 앨리스도 오비 경관도 카메오로 출연했고, 주민 일부도 흔쾌히 동참했다고 한다. 영화 개봉 후 앨리스의 교회-집은 버크셔의 랜드마크이자 자유를 갈구하는 청년들의 순례지로 더 떠들썩해졌다.
앨리스는 노래가 발표되기 1년 전인 66년 실제로 식당 ‘Back Room’을 열었다가 “내가 식당을 소유한 게 아니라 식당에 소유당하는 느낌”이 들어 1년도 채 안 돼 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노래가 알려지면서 덩달아 유명해진 걸 그는 불편해했고 더러 무례한 이들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자신을 “할리우드풍의 전형적인 히피”로 묘사한 영화를 못마땅해했다. “영화 이후로도 내 삶은 이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영화 캐릭터 속에 나를 가두어버린 듯해 무척 모욕적이었다. 영화 속 나는 실제의 나도 아니었다.”
영화를 찍던 무렵 이혼한 앨리스는 71년 교회-집을 팔고 후사토닉(Housatoic) 인근에 ‘Take Out Alice’란 간판을 건 새 레스토랑을 개업했고, 76년 탱글우드에 세 번째 식당 ‘Alice’s at Avoloch’를 열어 운영했다. 그리곤 79년 식당을 모두 접고, 앨리스 레스토랑의 자신과도 작별하고 “진정한 마음의 고향”인 프로빈스타운으로 이주했다.
개인 홈페이지에 그는 프로빈스타운을 “빛이 환상적인 마을”이면서 “하나같이 모나고 괴팍스러운 괴짜 주민들도 무척 멋진 곳”이라고 소개했다. “네모난 구멍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멈춘 동그란 못들의 훌륭한 조합. 나 자신이 되거나 새로운 나를 창조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
프로빈스타운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며 작은 화랑을 운영했고 마을 공동체 일도 앞장서 챙기곤 했다. 바닷가를 산책하다 마음에 드는 조약돌이 보이면 거기에 손바닥만 한 그림을 그린 뒤 도로 갖다 놓는 게 그의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어떤 돌-그림은 마트 진열대에 올려놓기도 하고, 자전거 도로 한편이나 울타리 기둥 위에 두기도 했다. “누군가가 나처럼 몽상하며 산책을 하다가 그 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상상. 그 상상이 나를 간지럽혔고 지금도 그렇다.” 친구들은 그 돌들을 지니고 세상을 여행하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뉴욕 현대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그랜드 캐니언과 만리장성 등에 슬쩍 놓아두곤 했다. 앨리스는 “조약돌(그림)은 판매용이 아님을 유념하세요”라고 홈페이지에 썼다.
지적인 유머와 일러스트로 채운 요리책 ‘앨리스 레스토랑’과 회고록 ‘레스토랑 주인 앨리스의 삶’을 출간한 적이 있는 앨리스는 85년 알로와 함께 유쾌한 동화책 ‘당신의 고양이 마사지해주는 법(How to Massage Your Cat)’을 출간하기도 했다.
둘은 평생 친구처럼 지냈다. 알로는 영화가 60년대의 실패한 유토피아로 묘사했던 앨리스의 교회-집을 91년 구입, 비영리 ‘알로 거스리 센터’ 겸 거스리 재단 사무실로 개조했다. 센터는 청년 공동체 모임과 다종교 행사 공간 겸 공연 장소로 활용되며, 매년 추수감사절마다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무료 만찬을 제공한다. 2019년엔 누가 거스리 센터 마당에 낡은 소파와 쓰레기를 잔뜩 쏟아놓고는 그 위에 “오비 경관이 시켰어요”라는 쪽지를 두고 간 적이 있었다.
앨리스는 2020년 말기 폐쇄성 폐질환 진단을 받았다. 프로빈스타운 출신인 70, 80년대 인기 뉴웨이브 밴드 ‘Human Sexual Response’의 보컬 디니 라모트(Dini Lamot) 등 친구들이 병원비 모금 캠페인을 벌였다. 디니는 80, 90년대 AIDS 공포가 프로빈스타운을 휩쓸던 시절 앨리스가 앞장서서 환자들을 돕고 게이 커뮤니티를 지원한 일 등을 환기하며 “우리를 위해 그가 해온 일, 그가 마련해 베푼 음식들, 그의 관대함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라며 “이제는 우리가 받은 것들을 되돌려줄 때”라고 호소했고, 모금액은 금세 목표(12만 달러)를 넘겨 17만 달러가 됐다. 모금 페이지에는 그에게서 도움을 받은 수많은 이들이 밝힌 추억도 함께 실렸다. 메인주에 사는 렉스 리처드(Rex Richard)라는 이는 “돈과 일자리가 간절히 필요했던 어느 해 겨울, 자격도 안 되는 나를 (식당에) 고용해주고 은행에 데려가 첫 계좌를 개설하도록 도와준 이가 앨리스였다”고 썼다. “앨리스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찾아오면 늘 일거리를 주거나 돈을 주곤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앨리스는 지난 추수감사절을 일주일여 앞두고 웰플리트의 한 호스피스 병원에서 별세했다. 앨리스 식당 주인과 종업원으로 만나 평생 친구로 지내며 앨리스를 임종한 비키 메릭(Viki Merrick)은 "앨리스는 늘 그랬듯이 마지막까지 시적인 말장난을 즐기며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런 내적인 안정성은 자잘한 이해 따위엔 아랑곳 않고 한생을 살아낸 이들이라야 누릴 수 있는, 어떤 초월의 경지일 것이다. 아니면 ‘앨리스 레스토랑 매서커’처럼, 삶이란 우발적인 사건(만남)의 연속일 뿐이어서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그 꼭두각시놀음을 끝까지 해내야 하는 존재라는, 밀란 쿤데라 식의 세계관이 바탕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작가 플로랑스 누아빌은 평전 ‘밀란 쿤데라: ”글을 쓰다니, 참 희한한 생각이네!”'에서 “그 자각은 비관이나 절망에 속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자명성”이라고 썼다. “이 자명성은 대개 우리를 맹목으로 만드는 집단의 꿈, 흥분, 기획, 환상, 투쟁, 명분, 종교 이데올로기의 열정 등에 가려져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베일이 걷히고 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더불어 홀로 고독하게 남게 된다. 육체의 처분에 맡겨진 채.”
말년의 앨리스는 건강이 악화하면서 손떨림이 심해지자 “이젠 그림 스타일을 추상화로 바꿔봐야겠다”고 홈페이지에 썼다.
2022년 알로와 릭은 65년 이후 57년 만에 처음 앨리스를 찾아 함께 추수감사절 만찬을 즐겼다. 알로의 아내 마티(Marti)는 “(물론) 이번에는 쓰레기 소동은 없을 것”이라고 지역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알로는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의 부고를 전하며 “불과 2주 전에도 통화하며 다시 대화할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무척 많이 웃었다. (…) 다가오는 추수감사절은 그녀 없이 맞이하는 첫 추수감사절이 될 것이다.”
더러 10, 20대 청년들이 앨리스를 찾아와 “60년대의 멋진 삶”을 부러워하곤 했다고 한다. 앨리스는 자신의 60년대나 그들의 21세기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답했다. “삶의 뒷문을 열고 그냥 내려 바깥으로 나오면 돼. 다른 점이 있다면, 너희는 너희 일 때문에 너무 바쁘다는 거야.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며 바빴지. 그리고 우린 세상을 바꿨어.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