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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

입력
2016.09.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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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9월 2일

1975년 9월 2일 서울 여의도 '5.16광장'에서 열린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 자료사진
1975년 9월 2일 서울 여의도 '5.16광장'에서 열린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 자료사진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學徒兵)은 18세 미만 소년병이었다. 징집 연령에 미달한 중ㆍ고교생 혹은 그 또래의 그들은 전쟁이 났다니까 총을 들고 싸우자는 생각으로 참전한 ‘의용군’이었지만, 상당수는 자의에 반해 강제징집 당했다. ‘6ㆍ25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소년병전우회)’에 따르면 참전 소년병은 약 2만여명, 개전 당시 정규 육군(9만4,000명)의 1/4 규모였다. 그들은 전선으로 포탄 등 무기를 나르거나 부상병과 전사자를 엎거나 끌고 나르는 일을 맡았고, 더러는 총을 들고 실제 전투에 나서기도 했다. 2,464명이 전사했다.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진 건 1949년 2월이었다. 국방부와 문교부가 전국 중ㆍ고교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상 통일과 유사시 향토 방위를 명분으로 조직한 법외 학생단체였으나 그 해 4월 22일 중앙학도호국단이 결성됐고, 9월 대통령령으로 공식화됐다. 학도호국단의 활동은 반공ㆍ애국 웅변대회, 체육행사, 반공 궐기대회 등이 주였다. 그러면서 입단비와 월회비를 내야 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되고 호국단은 60년 5월 해체됐다. 물론 6ㆍ25 당시의 학도병과 학도호국단 조직은 공식적으로 무관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75년 5월 학도호국단 설치령으로 저 조직을 부활시켰다. 명분은 다를 바 없는, 학원 총화단결과 자주국방태세 확립이었다. 부활한 조직은 전과 달리 병영 집체훈련과 교련 등 상시적인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해 9월 2일, 당시 여의도 5ㆍ16광장에서 전국 1,460개교 146만 학도를 ‘대표’하는 학생 등 4만1,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이 열렸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훈시에서 “나라를 지킬 결의를 가다듬고 대비를 서두르는 것은 겨레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며 나라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한때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학생들은 등록금과 별도로 학도호국단비를 내야 했다.

5.17 전두환 군부는 10.26 직후 축소된 저 제도는 다시 강화했으나 반발에 부딪쳐 85년 대학, 이듬해 고교의 학도호국단을 폐지했고 학생회가 들어섰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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