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조선 평양부 대동문통에 자리를 잡고, 주인의 이름을 옥호에 내건 림중식면옥(林仲植麵屋)은 상당한 규모의 면옥이었다. 종업원이 10이나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집의 종업원 대우는 시원찮았다. 1927년 2월 7일 밤에 벌어진 일이다. 허기진 종업원 열 사람 앞에 림중식이 내어준 밥은 며칠 묵은 데다 얼기까지 한 밥이었다. 종업원들은 제 몫의 끼니를 보고 “포악”하다고 느꼈다. 또한 “분개”했다. 반죽꾼으로 일하던 김치문은 행동이 앞섰다. 김치문은 밥그릇을 내던졌다. 김치문은 “주인에게 행패를 부”렸고, 그 뒤 전 종업원 파업이 시작되었다(‘조선일보’ 1927년 2월 11일자).
왕조의 실록과 의궤, 그리고 고조리서와 이른바 반가와 종가에 전해온다는 비법만을 전통의 전부로 생각하는 순간, 한국 음식문화사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지나치게 성글어진다. 성글어지다 못해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근 100년 간 한국 음식 문화의 충격이란, 요컨대 전에 없던 음식 상품화의 충격이다. 음식이 이윤과 임금노동이라는 맥락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맞은 사회경제사의 충격이다. 음식점이라는 전에 없던 제도를 처음 대한 대중이 느낀 충격이다. 또한 음식점 음식과 공장 생산 식품에 대한 선망을 대중과 대중매체가 서로 함께 증폭시키며 만들어낸 충격이다. 이 충격을 보통 사람의 가정이 고스란히 받아들인 충격이다.
실록과 의궤와 고조리서와 한 집안 비법은 이를 담을 이유가 없다. 이들 자료는 오히려 앞서 말한 충격이 그 전에는 없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자료이다. 국가와 가문의 의례에 나온 음식에 어디 관능상의 평가가 껴들겠는가. 공동체 안에 머문 음식과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음식은 태생이 다르다.
“주인에게 횡포” 음식노동사 블랙리스트
다시 1927년으로 돌아가자. 이때는 조선 대도시의 음식점 영업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때다. 더구나 조선의 제2도시 평양은 1924년에 인구 10만을 돌파하고, 1930년대 말 인구 30만을 돌파하는 등 무섭게 성장하는 도시였다. 평양은 도시 성장과 함께 무려 50군데나 되는 면옥이 성업한 냉면의 도시였다. 이제 얼음은 사계절 내내 공급된다. 고조리서 제면의 전제는 제분이다. 그런데 제분업이 성장하면서 공장이 공급한 메밀가루가 얼마든지 시장에 나왔다. 육수 맛에 요술을 부릴 인류 역사상 첫 MSG인 아지노모토는 1910년 8월 조선에 상륙했다. 면발에 탄력을 더할 “면소다”, 즉 식용 탄산수소나트륨도 주인이 쓰기로 결심하면 없어서 못 쓸 일은 없는 세상이 되었다. 냉면의 진짜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그만큼 냉면 일을 할 인력이 더 필요했다.
면옥 일은 한 철의 날품팔이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면옥은 노동자를 고용해 분업 체제를 갖추었다. 면옥의 주방에 반죽을 맡은 반죽꾼, 면을 삶는 발대꾼, 면을 찬물에 헹구는 앞잡이, 손님에게 나가기 직전 냉면의 화룡점정 장식을 담당한 고명꾼 같은 새로운 주방 노동자가 나타났다. 주방 밖에서도 사람이 필요했다. 여느 음식점에서 배달을 맡은 이들은 그저 배달부로 불렸지만, 냉면을 배달하는 이들은 따로 “중머리”라고 부를 정도로 대중에게 별난 존재로 인식되었다. 면옥 영업은 도시에 이채를 더하는 새로운 문물이었다.
묵고 언 밥을 내던진 반죽꾼은 숙련 노동자였다. 앞서 나온 행패란 분을 참지 못한 자의 욕설과 주먹질이었을 것이다. 아예 밥상까지 엎었는지도 모르겠다. 숙련 노동자를 비롯한 종업원이 파업을 결심하자 림중식면옥도 멈추어 섰다. 가진 사람들의 대응 또한 빠르고 확실했다. 면옥 주인들이 결성한 평양면옥조합은 즉시 임시평의원회의를 개최했다. 그들은 “주인에게 횡포한 행동을 하는 직공은 일체 사용치 않기로 결의”했다. 음식 노동사상 블랙리스트의 탄생이다. 아울러 이 결의를 어긴 면옥에 대해서는 3원의 벌금을 물리기로 결의했다.
여기서 끝날 리가 없다. 일제 평양경찰은 평양면옥조합의 결의 직후 김치문을 포함해 모두 4명의 조합원을 구속했다. 이들을 붙잡아 경찰서에 몰아넣는 데에는 “고등계”가 나섰다. 일제 고등계란 독립운동과 반제국주의 활동을 감시하고 정치범과 사상범을 담당한 고등경찰을 이른다. 노동운동 탄압 또한 고등경찰의 중요 업무였다.
평양면옥노조 ‘착취’에 맞서 뭉치다
새 시대의 냉면이 불티나게 팔리고, 전에 없이 면옥이 성장하는 만큼 면옥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또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김치문이 밥그릇을 던지기 전에, 이미 면옥 노동자들은 일제 고등경찰이 신경을 곤두세울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
1925년 평양 시내 면옥 노동자들은 “착취”와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직화에 들어섰고, 1925년 4월에는 270명 조합원 가운데 208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일터는 달랐지만 노동자는 단결의 힘을 알고 있었다. 평양면옥노동조합으로 불린 이들은 산별노조처럼 행동했다. 1925년 4월 25일 이들은 고용주를 상대로 임금 인상 외에 본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자를 채용하지 말 것, 채용과 해고에서 본 조합의 승인을 얻을 것 등을 요구했다.
더욱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일요일과 각 면옥의 휴업일을 유급휴일로 할 것을 요구한 점이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현대를 이해한 현대인이었다. 이들은 전략을 가지고 움직였다. 조합원 208명은 4월 30일 다시 평양 시내에 집결했다. 그러고는 한층 수위가 높은 파업을 결의한다. 초파일 곧 석가탄신일은 당시 공휴일은 아니었지만 제등행렬 같은 볼거리가 있어 잔치 분위기가 있는 날이었다. 대도시 시민들은 이 날을 휴일 아닌 휴일로 여겼다. 덕분에 냉면 주문이 폭증하는 면옥의 대목이었다.
1925년 초파일, 평양 시내 면옥은 간신히 문만 열었다. 주인과 온 가족이 매달려 노동자 없이 문을 연 것이다. 그러나 중머리의 배달은 포기해야 했다. 이윽고 평양경찰서 고등계가 중재에 나섰다. 이날 오후 3시 평양면옥노동조합원들은 중재를 받아들여 복귀했다. 임금 인상안, 유급휴일 보장, 이번 총동맹파업을 이유로 어떤 해고자도 내지 않을 것 등을 경찰 중재로 면옥 주인들과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어디서 본 것 같은 일이 벌어졌다. 평양 면옥 가운데 김제룡랭면집, 석기태랭면집, 신영우랭면집 등에서 50명의 노동자를 해고한 것이다(이 기간 ‘동아일보’ 참조).
“조합원은 비통함을 참지 못하고 울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일터가 새롭고, 일이 새로웠건만 자본가 또는 실업가라고 하기 뭣한 “주인”들은 주방에서 가부장 노릇을 했다. 그들의 일제 경찰 의존은 농민의 저항이 일어나면 원님 바짓가랑이를 붙들던 토반 지주의 행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우스운 짓도 했다.
1925년 11월 평양 내 면옥 주인들은 육수에 닭 육수를 덧국으로 쓰거나 아지노모토를 쓰지 않기로 결의해 세상의 비웃음을 샀다. 면옥 간 경쟁을 줄이고, 하루 2~3원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이 결의는 현대적 경영과 동떨어진 구시대적 작태일 뿐이다. 내 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언 밥 내놓는 마음이 여기 깃들어 있다. 일제 경찰은 일제 경찰대로 조선 노동자 단결이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가 싫은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런 때에 면옥 노동자들은 내 삶을 누구에게 구걸하지 않았다. 단결했다. 연대했다. 그리하여 구시대 인물과 일제 경찰을 협상과 중재의 자리로 끌어냈다.
속 시원한 한 방의 해결을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면옥 노동자들은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부산에서 파업중인 인쇄 노동자들에게 29원 32전을 모금해 전달하기도 했다. 조합원과 시민을 향한 강연회도 꾸준히 이어갔다. 이들이 초빙한 연사들은 대개 일제 경찰이 “불온” 딱지를 붙일 만한 인물이었다. 1930년에는 평양 시내 일곱 군데 악덕 면옥을 습격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1931년에는 조합 결성 기념식까지 성대히 열었다. 평양 외에도 사리원, 해주, 원산, 신의주 등 오늘날에도 냉면과 함께 떠오르는 서울 이북 도시가 다 면옥노조가 대단했던 곳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이면 어떤 노동운동도 일제의 탄압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평양면옥노동조합 소식도 잦아들던 1936년 4월 23일, 지난 11년간 활동한 사리원면옥노동조합마저 일제 경찰의 해산 명령으로 하루아침에 해산된다. 단결과 상부상조를 통해 사리원 시민의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낸 노동조합이었지만 독일, 이탈리아와 짝패가 된 무시무시한 일제를 이겨낼 길은 없었다. 해산하는 날 “조합원 오십여 명은 비통함을 참지 못하고” 울었다.
최근 100년의 음식문화사를 쫓다 보면 어김없이 만나는 풍경이 있다. 바로 논밭과 산골과 포구에서 음식 자원을 놓고 벌어진 전에 없던 싸움이다. 새 음식점만큼 새로운 노동운동의 탄생이다. 전에 없던 것은 냉장고나 아지노모토만이 아니다. 1919년 3ㆍ1운동은 때가 안됐는데 쓸데없이 거리에 나섰다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은 일일까. 평양면옥노동조합의 총파업, 김치문의 밥그릇, 사리원면옥노동조합의 눈물이 다 잊을 수 없는 음식문화사의 한 장면이다. 우리가 냉면 한 그릇 먹기까지 만만찮은 역사를 지나왔음을 떠올리게 하는 한 순간이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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