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이맘때는 이른바 폭도 정국이었다. 농민 없는 농업정책에 부아가 치민 농민들이 서울 도심을 들쑤시자, 일부 언론이 작명했다. ‘때리고 부수고 불지르고 교통까지 막히게 한’ 현상에만 골몰한 탓이다. 그보다 1년 전 대통령 사과와 경찰청장 사퇴로 이어진, 경찰의 과잉진압 탓에 숨진 두 농민(전용철 홍덕표)은 잊혀졌다. “자식 같은 소도 죽이고 우유도 버리고 벼도 태운, 이대론 죽을 것 같다”던 농민들의 절규도 자업자득마냥 묻혔다.
농민들이 해마다 상경하는 까닭은 너무 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유를 애써 고민하지 않는다. 아니 외면한다. 쌀값이 폭락하고 유망작물이 망하고 농촌은 늙어가는데 정부 대책은 한가하다. “서울 사람 아니면 국민 취급 안 한다”는 한 농민의 푸념처럼 제 목소리를 보다 가까이, 더 크게 들려줄 요량으로 폭도란 오명도 감수한다. 고 백남기씨도 그들 틈에 끼어 있었을 게다.
사건 당시 동영상을 보면 백씨는 차벽을 쓰러뜨리려는 밧줄을 잡았다. 남보다 앞선 자리에 홀로 나섰고, “(백씨에게) 쇠파이프 등 불법시위 정황은 없었다”던 경찰의 집중 타깃이 됐다. 물대포를 쏜 경찰들은 국정감사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희는 몰랐다”고 했다.
“(백씨 사건을) 9시 뉴스에서 봤다”(강신명 전 경찰청장), “(관련 상황속보는) 이제 없다”(이철성 현 청장)는 두 치안총수의 해괴한 발언은 우리 공권력의 수준을 에누리없이 까발린다. 그게 무능이든 거짓이든 대개 권력의 하수인(청와대 비서관 출신)이 치안총수를 맡아온 이 땅의 역사를 대변한다. 피해자가 버젓이 있는데 범인을 못 잡는 사건은 무릇 경찰에겐 치욕일진대, 백씨 사건만은 ‘미제 사건’임을 떳떳이 밝히는 꼴이라니.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크기 때문에 공권력의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야 한다.”(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 발언) 정국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책임자 처벌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일선 경찰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백씨 사망은 결국 경찰의 과잉진압과 맞닿아 있다. 최근 연이은 촛불집회를 두고 “성숙한 시민의식” 타령하는 경찰 지휘부는 ‘성숙하게’ 차벽부터 치우기 바란다. 2005년 대통령 사과에도 이틀이나 버티던 허준영 전 청장조차 사퇴의 변에 이렇게 밝혔다. “경찰의 장비 보강이나 법규의 강화는 오히려 과격시위를 부추길 수 있습니다.” 경찰은 10년 넘게 거꾸로 가고 있다.
10여 년 전 농민집회 현장을 취재하다 쫓기는 시위대에 밀려 넘어진 적이 있다. 툭툭 털고 일어서는데 득달같이 달려온 경찰들이 나를 쓰러뜨려 에워싸고 복날 개 패듯 했다. 기자라고 외치고 신분증을 꺼냈지만 “어쩌라고, 이 XX” 욕설까지 더한 집단 곤봉구타는 더 거세졌다. 안경과 휴대폰이 부서지고 소지품은 사라졌다. 범벅이 된 삭신의 굴욕이 공포와 통증을 마취시키는데도, 투구에 적힌 숫자는 또렷이 기억했다. 경찰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틀 뒤 폭행 당사자 중 1명이 불려왔다. “신분을 밝힌 뒤에도 때린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정신이 없었고, 누가 그러는(때리는)지 모를 줄 알았다”고 실토했다. 그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전날 다른 시위를 막다가 다쳤다”고 했다. 분노와 애련을 저울질하다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겠지만 애꿎은 시민이 다칠 수 있으니 정신은 차려야 한다, 제대하면 술 한잔 하자”고 다독였다. 담당경찰에게 나머지 가해자들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백씨의 죽음에 부쳐 그날의 용서를 후회한다. 사안의 경중과 결은 다르지만 경찰의 해명은 어찌 그리 비슷한지. 조직의 명이라는 면죄부에 기댄, 통제되지 않은 공권력은 국가폭력임을 간과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선다는 논리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공권력은 국민이 부여한 힘이고, 그 힘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유지된다. 농민도 국민이고, 우리가 백남기다.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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