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박근혜가 반대세력으로부터도 그나마 인정받았던 건 ‘원칙’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게 누군가의 코치에 의한 것이었는지, 막무가내로 버티는 요즘처럼 애초의 성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아무튼 박근혜의 원칙 이미지는 대개 표리부동한 정치인 집단과의 차별성이었다.
정치인 박근혜는 그를 통해 이른바 ‘신뢰’의 아이콘으로 성장한다. 스스로도 이를 잘 알아서였을까. 대선후보 시절부터 그는 신뢰와 경제의 관계를 많이 결부시켰다. “시장에 돈이 돌지 않는 것은 역시 신뢰가 없어서다”(2008년10월) “신뢰 부족으로 생기는 사회적 갈등 비용이 300조원이다”(2010년1월) “신뢰와 원칙이라는 무형의 인프라ㆍ사회적 자본을 구축해야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2010년5월) 등등의 언급은 대통령의 신뢰가 경제에 끼칠 긍정효과를 다소나마 기대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박 대통령이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사람들이 요즘 지지율(4%)로 확인되니 지난 대선에서 기호 1번을 찍은 유권자 51%와 나머지 49%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이런 ‘박근혜의 신뢰’를 크게든 작게든 이성적으로 신뢰한 집단이라 할 수 있겠다.
한데 그 신뢰가 누군가의 말마따나 지금 ‘사상누각’처럼 무너지고 있다. 한때 신뢰의 아이콘은 이제 불신의 대명사가 됐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경제민주화를 포함, 지난 4년간 지하경제 양성화, 복지 향상 등 유권자와의 숱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백 번 양보해 어느 정도 불가피한 현실 때문이었다 치자. 그런데 이제는 사과라고 했던 말조차 거짓으로 드러나고, 검찰 수사도 못 믿겠다며 국가의 시스템마저 부정하는 지경에 왔다. 대통령의 기막힌 배신에 많은 국민이 치를 떠는 이유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이런 불신이 대통령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뢰 브랜드에 편승했던 이 사회 지도층은 대통령의 탈선에 발 맞춰 스스로 발 딛고 선 사회적 신뢰마저 붕괴시켰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던 대통령 비서실장, “최순실을 모른다” “시켜서 했을 뿐”이라던 숱한 참모와 공무원들의 뻔뻔함은 공직사회를 신뢰의 대상에서 탈락시켰다. 최순실의 겁박에 숱한 반칙으로 쌓아 올린 정유라의 학력을 도운 자들은 교육 시스템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대통령을 공범으로 규정한 검찰의 수사결과에 안도했지만 그들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권력의 장악력에 따라 표변하는 국가 사정기관의 태도는 그들이 머리 좋은 법률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한층 굳혔다.
심지어 요즘엔 야당조차 이런 신뢰 상실에 일조하고 있다. 지난 몇 주 간 엄청난 국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도 계속 표 계산만 하는듯한 이미지는 정치권 전반에 대한 기대를 더욱 떨어뜨린다. ‘이게 나라냐’는 외침 속엔 이 모든 배신감과 불신이 짙게 녹아 있는 게 아닐까.
경제ㆍ경영학자들은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뢰 구축이 한국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필수요소라고 반복해 지적한다. 지난달 대한상의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신뢰도는 35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3위에 불과하다. 사법시스템 신뢰도(34개국 중 33위)는 더 바닥이다. 보고서는 우리가 사회신뢰도를 북유럽 국가 수준으로만 올려도 성장률이 (이 정부가 바랬던) 4%대로 올라갈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대로 말하면, 신뢰 회복 없인 더 이상의 성장도 어렵다는 의미다.
시간이 흐르면 정권도, 사람도 바뀔 것이다. 창조경제의 자리는 또 다른 ‘○○경제’가 차지하고, 국민소득 ○만불, 성장률 ○% 구호도 다시 나부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국민이 그 희망을 다시 신뢰할 수 있을까이다. 우리 앞에 남겨진 이 거대한 냉소주의, 의심은 누가,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한때나마 ‘신뢰’를 신뢰했던 대가가 너무 크다.
김용식 경제부 차장 jawoh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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